제목 21세기, 다시 쓰는 『조선책략』
작성자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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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650 등록일 2006/2/18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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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21세기, 다시 쓰는 『조선책략』

도자기 기술로 본 한·일 흥망사

‘백자기술 보유국’조선이 망한 까닭은?

우리 서민들이 쓰던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천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환상의 도자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해도, 조선의 관료들은 막사발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 다이묘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할 뿐 그것을 수출해서 돈을 벌 생각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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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백년 전, 동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진출과 함께 중화(中華)질서가 여지없이 붕괴되는 질서의 대변혁기에 처해 있었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조선은 철저히 실패했다. 당시 비슷한 수준에 있던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는데 왜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나라를 잃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교육은 우리의 잘못보다는 「남의 탓」에 치중해온 감이 든다. 그동안 우리의 근대사 교육은 일제의 만행을 밝히고 규탄하는 데에 초점을 두어왔다. 그 결과 『일제가 너무도 악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이 광복 이후 교육을 통해 갖게 된 일반 국민들의 인식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우리가 했던 일들을 합리화하고, 우리의 치부는 여전히 덮여 있는 상황이 계속됐다.

역사교육에 있어서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나라를 잃었던 역사로부터 무언가 교훈을 얻으려면 당시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자성이 훨씬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21세기로 넘어가는 현 시점에 우리가 마치 19세기 말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든다. 우리의 경제주권은 IMF에 의해 제약받고 있으며, 북한 또한 대외지원 없이는 체제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19세기 말처럼 한반도의 상황을 우리가 주도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좌우되던 어리석음을 또 다시 범해서는 안된다.

과거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준다. 그런 점에서 1백년 전 우리가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관한 자성은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침이 될 수 있다.

백자의 비밀

「백자」는 조선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17세기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 이상의 첨단 기술이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이 그 기술을 얻기까지 도자기를 희게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한국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백자를 만드는 하이테크 기술을 가진 조선은 백자의 진가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을 활용하여 국부(國富)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반면에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얻은 백자기술을 활용, 도자기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명치유신을 성공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도자기는 인류문화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당시의 문화와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척도가 된다. 흔히 도자기라고 말하지만 도자기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즉 점토와 구울 때의 온도 차이에 따라 단단함, 투명성, 흡수성 등이 다른 토기(土器), 도기(陶器), 석기(火石器)로 각각 구분된다. 최초의 도자기는 진흙으로 적당히 빚어 말린 토기였지만 불을 활용하면서 도자기는 점점 단단해졌으며, 더 고온에서 도자기를 구울 수 있도록 가마도 개량돼갔다.

토기, 도기, 석기를 거쳐 인류가 고안한 게 자기였다. 결국 도자기의 정점은 자기인 것이다. 자기는 순도 높은 백토(白土)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1천3백∼1천3백50도의 가마 안에서 구운 것으로, 흙과 유약이 완전히 자화(磁化)돼 반투명질의 상태가 된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도기, 석기의 단계에는 일찍 도달했지만 자기를 만드는 단계에 도달한 국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은 그 몇 안 되는 국가 중에서도 수백년을 앞서서 자기를 만들어냈다. 요즘 세계 도자기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일본과 유럽은 각각 17세기와 18세기에야 비로소 자기를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다.

반도체 등 첨단제품의 신소재로 널리 쓰이고 있는 세라믹이 다름 아닌 자기다. 첨단 소재인 세라믹을 우리 민족이 세계에 앞서서 개발한 셈이다. 자기 중에서도 백자는 가장 어려운 기술로, 백자를 만들 수 있게 되면 이를 바탕으로 무궁무진한 세라믹의 세계를 전개할 수 있다. 얼마 전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 조선백자에 매겨진 어마어마한 가격을 보면, 우리 백자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최첨단 기술을 갖고 있던 조선은 왜 이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을까?

조선을 제외하고 백자제조 기술을 얻은 국가들은 모두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자기를 만드는, 특히 백자를 만드는 비밀을 알아냈다. 4백년 전 일본은 조선을 침공해서 수많은 조선 도공들을 끌고 갔다. 그 바람에 조선의 도자기 산업이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 끝난 지 수십년이 지난 광해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궁중 연례에 사용할 청화백자 항아리가 없어서 전국에 수배할 정도였다.

조선의 천민에서 일본의 장인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다이묘(영주)들은 제각각 경쟁적으로 조선도공들을 끌고갔다. 그러나 일본의 다이묘들이 임진왜란중 조선 도공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던 것은 당시 조선 천민들이 사용했던 막사발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막사발이란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그리고 탁주를 마시던 술잔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투박하고 소박한 도자기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이토자완(井戶茶碗)」으로 불리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다이묘들이 다도(茶道)에서 애용했던 「환상의 도자기」였다. 막사발 아닌 이토자완은 현재 백수십개밖에 남아 있지 않고 일본에서 국보로 대접받는다. 가격도 20억엔에서 1백억엔을 호가하여 도요토미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천문학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내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어느 누구도 천민들이 쓰던 막사발을 보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도공 이상평은 아리타(有田)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를 발견했다. 이를 사용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빚었기에 그는 도조(陶祖)로 추앙받게 된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다이묘들의 극진한 지원 아래 마음껏 예술성을 살릴 수 있었다.

천민이나 관노의 성격을 가졌던 조선 도공들이 왕실이나 관에서 요구한 것을 만들어야 하는 체제로부터 벗어나 실명으로 자신만의 도자기를 빚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조선 도공들은 아리타 등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여 민족의 혼을 담은 백자, 청자를 구현했으며, 당시 최첨단이었던 중국 양식도 소화하고 일본 문화의 수요에도 응하면서 도자기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한편 조선 백자는 유교적 통제사회의 영향인 듯 거의 정형화된 틀과 문양에다, 쓰이는 색도 한정됐다. 이는 물론 이조백자의 소박한 예술성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도공들이 빚어낸 일본 백자는 주자학의 정형화된 도그마에서 벗어나 조선 일본 중국의 모든 장르를 소화하면서 때로는 소박하고 때로는 화려한 도자기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 도공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만든 일본 자기는 놀랄 정도의 상상력과 참신성을 바탕으로 세계 도자기의 디자인을 선도했다.

이러한 상황이었던 일본 도자기산업에 중요한 기회가 도래했다. 17세기 중반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던 중국의 경덕진요(景德鎭窯)가 명청(明淸) 교체의 내란에 휩쓸려 쇠퇴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 등 세계 도자기시장을 휩쓸던 것이 바로 중국 경덕진의 도자기였다. 도자기의 영어표기가 「차이나」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명치유신은 도자기 교역의 산물

경덕진의 쇠퇴로 질 좋은 도자기를 얻을 수 없게 된 유럽은 새로운 도자기 수입원으로 일본을 주목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조선 도공들이 빚어낸 「아리타야기(有田燒)」를 사들여 유럽시장에 팔았다.
아리타야기는 당장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을 매료시켰다. 당시 귀족들은 중요 부분으로 사용하여 경쟁적으로 귀중한 도자기를 손에 넣기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왕은 아리타야기 하나를 6백명의 병대와 교환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왕족 귀족들은 궁전이나 저택에 도자기만 산더미처럼 진열해놓은 방(porcelain cabinet)을 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독일 드레스덴의 군주였던 작센공 아우구스트는 1천6백점에 달하는 보물급 아리타야기를 수집했을 정도였다.

이런 결과로 일본의 규슈 지역은 유럽과 도자기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사쓰마, 죠오슈, 사가 등 규슈 지방이 강력한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체제에 도전해 이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도자기 교역을 통해 얻은 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 도공들의 손길에서 시작된 일본 백자가 일본의 역사를 바꾸는 명치유신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조선의 백자기술은 일본을 거쳐 유럽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한 작센공 아우구스트는 백자에 매료된 나머지 백자의 독자적 개발을 명하기에 이르렀다. 아리타야기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모방을 거쳐 드디어 1710년 유럽 최초의 자기가 독일 마이센에서 완성됐다. 이후 유럽 자기는 동양에서 발명된 자기에 서양적인 장인정신과 합리성을 가미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백자가 일반에게까지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근대화와 산업혁명을 이끈 유럽의 합리주의에 힘입은 바 컸다. 우리가 항상 애용하는 접시, 커피잔 등 식기들도 원류는 동양이지만 유럽인들이 개량한 것이다. 유럽 도자기들은 일본과 함께 오늘날 세계의 고급 도자기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왜 조선은 백자를 활용하지 못했나

이렇듯 조선 백자를 원류로 둔 일본과 유럽의 도자기들이 세계시장을 석권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동안, 조선은 백자라는 첨단기술과 상품을 전혀 국가의 번영에 활용하지 못했다. 여기서 조선이 1백년 전 질서의 대변혁기에 철저하게 실패한 원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자학에 입각한 조선의 정치경제 시스템 자체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주자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공자 맹자의 왕도정치 이념을 통해 체제유지를 꾀했다. 성현들의 말씀을 옮긴 교양지식의 집적에 불과했던 유학을 체계화해서 유교로 승화시킨 것은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였다. 주자학은 유학에 강렬한 가치관 내지는 형이상학성을 도입했다.

주자학은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왕조의 정통성에 집착했다. 사실 주자학은 시대상황의 산물로 이민족에게 부단히 위협받던 중국 송대의 왕조체제 유지를 위한 지배논리에 불과했다. 조선도 그래서 주자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조선의 과거시험은 주자학의 해석에 따라야만 했다.

그 결과 5백년 가까운 긴 세월 조선, 중국, 일본은 주자학의 도그마에 지배당했다.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다. 시대적 상황이 변하면 그것은 억지가 돼버린다. 그 억지이론이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것이다. 소위 「아시아의 정체」의 핵심은 주자학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 동아시아의 급속한 성장을 두고 유교적 전통에서 그 원인을 찾는 전문가들이 많다. 분명히 유교의 몇몇 덕목들, 예를 들어 높은 교육열, 예절 등은 아시아 성장의 주요인의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유교 전체의 도그마성은 아시아 정체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건국 초기 주자학은 왕도정치에 입각한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에는 매우 유익했다. 그러나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왕조사회에는 사회 각 분야에 부정 부패가 만연하고 민란과 반란이 줄을 잇는 가운데 통치시스템이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됐다.

조선은 17세기 이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정치경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당시 조선에 필요한 것은 합리적인 법률 정비, 토지정책과 조세제도, 상공업의 육성 등이었지만 공허한 관념론인 주자학이 그런 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리 없었다. 주자학은 합리적 수습책을 제시하기는커녕 명분론 강화를 통해 당쟁을 심화시켰다. 지배관료층은 오히려 주자학의 명분론을 강화해 민중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유지 혹은 획득하기에 급급했다.

전쟁 이후, 요즘 말로 수많은 정권 교체가 있었지만 왕가의 복제문제, 왕위계승의 적서문제에 대한 주자학의 해석을 빌미로 지역이나 파벌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권교체였을 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정책 대립이 원인이 된 적은 전혀 없었다.

과거제도와 고시제도

조선의 관료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어려운 과거시험을 통해서 채용된 수재들이었다. 일단 과거에 급제하면 가문의 영광으로 본인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대대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시험의 내용이었다. 수험생들은 주자학의 해석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신학이 성경 해석에 매달리듯이 주자학도 일종의 신학이었다. 과거에 붙으려면 주자학에 관한 고전을 통째로 암기하고, 그 바탕 위에서 정해진 형식에 따라 답안을 써야 했다. 시바 료타로는 조선의 과거제도와 관련 『이렇게 훈련된 사람은 좋은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별로 부러울 게 없다. 이런 두뇌는 인류유산을 만들어 가는 두뇌가 아니다. 정말로 중국과 조선은 쓸데 없는 일을 해온 것이다』라고 통렬하게 꼬집는다.

주자학의 도그마만을 통째로 암기한 조선의 수재 관료들이 인간 사회의 선악을 논하는 데는 우수했겠지만 경제를 일으켜 국부를 쌓고,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고, 의료시설을 확충하는 등 사회의 현실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역사가 말해준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조선은 쇄국정책에서 벗어났다. 두고두고 불평등 조약으로 일컬어지는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협상에 있어서, 사실상 그 핵심은 개항에 즈음하여 조선의 경제적 이익을 어떻게 지키고 증진시키는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 조선측 대표인 신헌(申櫶)은 일본이 조약의 핵심 부분인 화폐제도에 대해 설명하려 하자 『사대부는 덕치(德治)에 대해서나 생각하지 통상문제와 같은 천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라고 하면서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이렇게 체결된 불평등 조약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남을 탓할 자격이 있는가?

18세기 청나라를 방문하고 온 일련의 조선 학자들이 가장 놀라고 부러워한 것은 바퀴였다. 정비된 도로를 따라 화물들이 바퀴 달린 수레로 이동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조선 건국 2천년도 훨씬 전에 로마 사람들이 이미 고속도로를 만들고 수레를 이용해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조선이 「은자(隱者)의 나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은 물류, 유통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조선 관료의 탓인지도 모른다.

과거제도의 문제점은 오늘날 우리의 고시제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과거시험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유리된 채 수많은 시험 과목을 통째로 암기해야만 합격할 수 있는 고시제도를 통해서 충원된 우리 관료들이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각 방면에 걸친 전문성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조선은 주자학에 입각한 일종의 이상사회였다. 조선사회에는 관료와 농민만 존재할 뿐 상업경제는 거의 도외시되었다. 철저한 신분사회로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서열에 따라 상·공은 천대받았다. 도공들은 뛰어난 장인이었지만 조선의 사회구조 속에서는 천민이나 관노들이었고 그들의 천재성은 세계적인 도자기를 발명해냈지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우리들은 뛰어난 백자들을 볼 수 있지만 그 백자들을 어떤 도공이 빚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의 실패는 「시스템」의 실패

반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비록 조국에서는 살 수 없었지만 존경을 받으며 자신이 빚은 도자기에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정확히 4백년 전 남원에서 끌려간 어느 조선 도공은 10여대를 이어오면서 「심수관」이란 이름을 자랑스럽게 사용해왔다.
조선의 3대 기본정책으로 흔히 억상(抑商) 정책, 쇄국(鎖國) 정책, 농본주의 정책을 든다. 당시 최첨단 상품인 백자가 있었지만 조선은 도대체 외국과 교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상업을 억제하고 외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최첨단 상품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조선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통해서 국민들의 외국 진출을 엄격히 통제했으며, 그 결과 민간상인들이 해외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봉쇄됐다. 왕실이나 양반계급이 필요한 외제품은 소위 「조공무역」을 통해 수입했다.

우리 서민들이 쓰던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천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환상의 도자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조선의 관료들은 막사발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 다이묘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할 뿐 막사발을 수출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백자가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그것이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체제가 「은둔의 나라」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은 건국시 주자학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이상향을 지향했다. 농본주의를 강조해서 표면적으로는 농민을 우대했지만 사실상 철저히 관 주도의, 좀 심한 표현을 쓰면 관료들을 위한 사회였다. 농민이 주가 된다고 했지만 극심한 조세 및 양역 부담만이 농민의 몫으로 관료들의 가혹한 수탈대상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재정파탄에 직면한 조선정부는 조세 수입을 늘리기에 급급했다. 관료층은 자신의 부담은 가볍게 하는 반면 그 대부분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떠넘겼다. 많은 수의 농민들이 과중한 조세부담을 피해서 유민이 됐다. 조선 말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민란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은 분명 유교의 관습이 사회 구석구석에 미친 수준 높은 문명국이었다. 그러나 공허한 관념론인 주자학의 도그마에 물든 조선의 정치경제 체제와 지배관료층은 도저히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서세동점의 시대에 조선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백자 이야기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한 예일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말

조선이 실패한 이유로 조선 자체의 문제점이 핵심적 이유라는 점에는 의문이 없지만 실패를 가속시킨 요인으로 국제적 변수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으로 내치는 독립이 인정됐지만 대외정책은 사실 독립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 못했다. 외교권이 없는 조선으로서는 조공무역에 만족할 뿐 현실적으로 대외무역을 개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이 백자를 가지고도 해외교역을 추진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은 역사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철저히 인지돼 있다. 반면 중국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해서 우리의 근대화에 좌절을 안긴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 말 조선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한계에 도달했고 제국주의 세력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형국에서 철저한 개혁을 통한 근대화만이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김옥균 등 개화파는 1884년 일본의 근대화를 모델로 쿠데타를 일으켜 보수파 요인들을 제거하고 개혁정부를 수립했다. 비록 일본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한계가 느껴지지만, 보수정권에 개혁을 기대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는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개혁정부는 중국의 무력개입으로 3일천하로 끝났다. 중국은 1882년 임오군란에도 개입해서 왕권을 회복시킨 바 있으며, 동학농민전쟁 시에도 일본과 함께 파병해 이를 진압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조선은 속국이지만 내치외교에 있어서 자주독립』이라는 중국의 주장에는 조선에 대한 외세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조선에 대한 자신의 종주권을 유지하려는 속셈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국은 조선의 현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던 일본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의 개혁을 방해함으로써 조선의 패망을 촉진했던 것이다.

조선이 패망한 이유 중에 일본 등 외세의 책동이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결국 우리의 책임이며, 그 점에 대해서는 철저한 자성이 필요하다.

사실 구한말 시대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외세들이 호시탐탐 노리기는 했어도 강대국간에 세력균형이 비교적 잘 형성돼 있던 시기였다. 일본 러시아 청나라 영국 등 어느 한 쪽도 한반도에서 절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시점이었다. 갑신정변의 배후에 일본이 있었어도 이를 청나라가 견제했으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겨도 러시아가 일본의 주도권을 좌절시켰다.

결국 이러한 국제환경을 활용했다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짧지 않은 시간이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강행하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조선의 각료와 원로대신들에게 『조선은 지난 10년 동안 도대체 나라의 생존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시설 하나 못만들지 않았는가』라고 몰아붙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이 모욕적 언사의 이면을 곱씹어야 하는 의무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연재> 21세기, 다시 쓰는 『조선책략』 ②

조선의 실패와 일본의 성공, 무엇이 명암 갈랐나

명치유신 성공비결은 ‘청렴한’ 주도세력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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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에 안방극장을 장식했던 「대원군」이라는 역사 드라마가 있다. 조선 말기의 풍운아 대원군이 일련의 개혁과 함께 쇄국정책을 취하다가 민비 세력에 밀렸다. 이어 청나라, 일본, 러시아 세력이 밀려 들어오고 조정은 친청, 친일, 친러로 사분오열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드라마는 전주 이씨, 민씨, 풍양 조씨, 개화당 사이에서 어떤 외세를 업고 누가 권력을 잡느냐가 주된 테마였다.
당시 「대원군」이 끝날 때쯤 채널을 NHK 위성방송으로 돌리면 「날아 가는 것처럼」(翔ぶが如く)라는 대하 드라마가 시작됐었다. 공교롭게도 이 드라마의 시대 설정도 대원군 시대와 같은 시기였다.

당시 일본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조직 피로, 체제 피로를 보이는 가운데 서구 제국주의가 진출해와 풍전등화의 처지에 있었다. 이때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하급 지방무사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陸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근대화, 즉 부국강병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의 방법을 놓고 대립 갈등하는 내용이었다.

똑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두 나라의 드라마는 조선이 실패하는 모습과 일본이 성공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극명히 보여주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충격 속에서 똑같이 전근대적이었던 두 나라의 어떤 차이가 불과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한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또 한 나라는 열강의 일원이 되게 했는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왜 성공했을까?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근대화」 즉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에 있었다. 세계역사상 일본만이 유일하게 근대화를 성공시켜 식민지화를 피하고, 심지어 제국주의의 일원이 되었다. 앞의 글(98년 6월호)에서는 조선의 실패 원인을 주자학의 도그마에서 찾았다. 이번 호에는 일본이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했는지 명치유신을 통해 살피기로 한다.

우리는 일본의 근대사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명치유신에 대해서 막연하게 조신침략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로서는 명치유신의 부정적 측면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정도 있겠지만, 명치유신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면 일본이 왜 성공할 수 있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명치유신은 1백년만에 찾아온 질서의 대 변혁기를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고구려, 백제, 일본은 형제국가?

일본의 외교평론가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는 한국주재 외교관 시절에 쓴 한 수필집에서 고대의 한일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관찰을 소개했다. 과거 유럽을 통치하는 정통성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에 있었다. 예를 들어 스페인 국왕이 죽으면 스페인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혈통을 갖는 오스트리아 왕자를 데려다가 왕으로 모셨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고대 동아시아 지배의 정통성은 부여족에 있었다. 부여는 북만주 송화강 유역의 넓고 비옥한 평원에 자리잡았던 고대 국가였다. 부여 왕자인 주몽은 이복 왕자들과의 경쟁에 패한 후 남하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주몽의 두 아들인 온조와 비류도 왕권 경쟁에서 패하자 남하해 온조는 백제를 세우고 비류는 계속 남하한다. 오카자키는 비류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비류가 천황가의 시조라는 주장도 있다. 결국 부여의 혈통이 부여를 비롯해서 고구려와 백제, 일본을 다스린 셈이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부여와 고구려, 백제, 일본은 부여계 형제국가로 볼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의 제럴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유명한 과학전문지인 『디스커버』 지에 실린 「일본인의 뿌리」라는 최근 논문에서 유전자 정보와 골상구조를 분석한 결과에 입각,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국 이민족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것은 이미 일본 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북방 기마민족인 한민족의 조상들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민족과, 때로는 같은 민족끼리 사투를 벌이면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흘러들었다. 고도의 철기문화를 갖고 있던 진한의 경우에는 철을 얻는 데 쓸 땔감을 얻기 위해 바다를 건너기도 했다. 고대 기술로 철을 얻으려면 엄청난 양의 땔감이 필요했다. 커다란 숲을 모조리 태워야만 철을 얻을 수 있었다.

한·일 차이는 독·불 차이

숲을 태우며 남하하던 진한 사람들은 숲을 찾아 드디어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민족들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경쟁에 패퇴하여 쓰라린 마음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구려에 밀린 일부 부여족이, 멸망한 가야인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린 자들이, 그리고 나당(羅唐)이 멸망케 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이 차례로 일본으로 건너가 원주민을 정복하고 일본 국가의 초석을 심었다. 특히 백제가 멸망했을 때에는 20만명에 달하는 백제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 갔다는 평가도 있다.
이번 주제에는 벗어나지만, 조국인 한반도의 생존경쟁에서 패퇴해 쫓겨난 한민족의 후예인 고대 일본인들은 권토중래의 꿈을 가졌을 것이다. 절치부심하던 한민족의 후예들은 일본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나라 만들기에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한풀이」에 나섰다. 임진왜란, 한일병합, 만주침략을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일본인들이 왜 그렇게도 한반도와 만주에 집착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일제시대 일본은 서울 용산으로 수도를 천도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것은 1천여년 전 한반도에서 쫓겨난 후예로서 본능의 표현일 것이다. 「우리의 후예」들이 와신상담한 끝에 오늘날 「본국」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경제대국을 이룩했다고 본다면,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질 수도 있지 않을까.

거의 모든 일본 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갔다고 단정짓는 한국인들의 인식에 일본인들은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일본 문화는 전부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에 의해 건설됐다』는 주장은 과거 일본의 황국사관만큼이나 위험하다. 사실 우리 문화도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자극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분명히 같은 조상을 갖고 있지만, 같은 민족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서로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임에는 분명하지만, 언어도 민족성도 가치관도 분명 다르다. 같은 씨에서 다른 꽃이 핀 격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초래했는가? 부여계로 이어지는 한반도와 일본의 연계고리가 중앙아시아 황금문화를 갖는 스키타이계에 속하는 신라에 의해서 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천3백여년 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한반도와 일본의 연계고리를 끊었고, 이후 한국과 일본은 왕래가 끊어진 채 각각의 길을 걸었다. 각기 다른 풍토와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반도나라 한국과 섬나라 일본은 각기 다른 민족이 된 것이다.

마치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와 독일로 나뉘듯, 지금 나타난 한국과 일본의 차이도 유럽에 비유한다면 독·불 정도의 차이로 볼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뿌리는 같지만 각기 다른 언어를 가졌으며 같은 민족이라고 하지 않는다. 1천3백년이라는 세월은 고대 한국어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진화시켰으며, 한 민족을 다른 민족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이상적, 일본인은 현실적

도자기는 한·일 양 민족의 기질과 문화의 차이를 극명하게 설명해준다. 박물관에 시대별로 진열돼 있는 우리의 도자기를 보면, 왕조별로 전혀 다른 개념의 도자기가 나온다. 신라시대의 토기,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백자가 그것으로, 역사의 흐름 속에 도자기 모습이 계승되면서 진화됐다기보다는 과거 왕조의 것은 철저히 부정되면서 전혀 다른 개념의 도자기가 나온다.
고려청자는 엄청난 것이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던 비취색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졌다. 그러나 청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자취가 사라져버렸다. 청자를 만드는 방법조차도 완전히 잊혀졌다. 대신 백자가 조선시대를 지배했다. 혁명적인 변화다.

반면 일본 도자기도 시대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다고 하지만, 그 변화과정은 한국의 경우와는 달랐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초래한, 조몬토기에서 야요이 토기로의 급격한 변화를 제외하고 일본 도자기는 점진적으로 진화 개량돼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도자기 역사는 양국의 국민성을 잘 대변해준다. 한국인의 가치관은 세상 일을 정의와 불의로 양분하고, 불의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을 제일로 본다. 중간이 존재할 수 없고, 이상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한국인들은 왕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를 부정한다. 새로운 왕조나 정권의 정통성은 과거 왕조나 정권을 부도덕한 것으로 부정함으로써 강화된다. 따라서 왕조나 정권이 바뀌면 모든 것이 철저하게 변화한다.

반면 일본인의 국민성은 상황에 순응하면서 눈앞의 일들을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간다. 매우 현실적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큰 변화는 없다. 우리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최고 지도자인 일본 총리가 말단 관리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국민성이 그러하다면, 봉건제 국가를 하루 아침에 근대 국민국가로 탈바꿈시킨 명치유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명치유신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바로 일본 국민성의 발로임을 알 수 있다.

18세기 말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을 거쳐 「근대 국민국가」가 등장하고, 이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때까지 앞서 있던 동양 문명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양에 추월당했다. 압도적인 과학기술과 생산력을 가진 서구 제국은 19세기 중반부터 식민지 확보를 위한 경쟁을 벌였다. 레닌은 자본주의 국가의 내재적 모순 때문에 제국주의로 치닫게 된다고 봤다. 부의 편중으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생산력을 따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국내에서 소비되지 않은 잉여 생산물과 잉여 자본도 생긴다. 이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고, 새로운 해외시장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에는 잉여 자본이나 잉여 생산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페인이 남미를,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한 것도 레닌의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제국주의는, 징기스칸이 유럽을 식민지화하던 상황과 영국이 중국을 유린한 것과는 그 이유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제국들은 19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몰려 들었다.

명치유신의 원동력, 존왕양이

1842년 아편전쟁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잠자는 사자라고 여겼던 중국이 사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중화질서의 지배자였던 중국이 영국에 여지없이 패퇴했다는 사실은 조선과 일본에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모험심이 강한 서양 오랑캐들이 연일 조선과 일본 연안에 나타났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조선, 일본, 중국 등 동양 3국이 내건 대책은 놀랍게도 똑같은 것이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왕에 충성하고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동양 3국 모두가 유교, 특히 주자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교국가였기 때문이다.

존왕양이 사상은 주자학의 본질이다. 주자학은 일명 송학(宋學)으로 중국 송나라가 처한 특수 상황 하에서 형성, 발전된 학문이다. 송나라는 주변 이민족 국가들의 팽창 때문에 고통받았다. 여진족인 금나라의 침략으로 화북지역을 빼앗기고 양자강 이남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따라서 오랑캐(夷)를 몰아내고 왕을 존중하는 사상에 입각한 주자학이 송나라에서 발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내건 존왕양이는 조선과는 다른 효과를 거뒀다. 1854년 미 해군제독 페리는 2백50문의 대포로 중무장한 10척의 현대식 군함을 이끌고 도쿄만에 진입했다. 이에 놀란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해 오랜 쇄국을 풀고 개국하기에 이른다. 특히 1858년 맺어진 미일 수호통상조약은 가혹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후 일본은 차례로 열강들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무력한 막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막부타도 운동으로 불붙었다. 지방 번(藩)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막부타도 운동의 주축이 됐다. 그들에게 서양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없었고, 있다면 다소의 주자학적 교양이 있었을 뿐이었다.

존왕양이 사상은 막부타도의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일본에서 존왕의 대상은 막부의 장군이 아니라 천황이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천황에 대해서 아예 그 존재를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교토에 있는 제사장이라는 정도였다. 일반 국민에게는 막부의 장군이 군주였으며, 조선을 비롯된 외국들도 천황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명치유신은 도쿠가와 막부를 부정함으로써 성립했다. 그런데 막부 밑에 있는 번의 무사들이 장군을 부정하려면 그 이상의 권위가 필요했다. 여기서 그들은 천황에 주목한 것이다. 형식적이나마 장군은 천황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하급 무사들은 존왕을 내걸어 막부를 천황에 대해서 불충(不忠)이라고 공격하고, 불충인 막부를 타도하는 것은 반역이 아니며, 정통성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양이 슬로건도 또한 막부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소재였다. 막부가 천황으로부터 부여받은 직위가 바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었다. 정이대장군이란 바로 오랑캐(외세)를 토벌하는 장군이다. 그런데 그 정이대장군이 오랑캐는 무찌르지 않고 오히려 오랑캐와 내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존왕양이 슬로건은 막부를 막강한 외세와 국내의 존왕양이파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처하게 했다. 더욱이 존왕양이 사상은 일본 민중들 사이에서 민족주의라는 극히 가연성 높은 감정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기에도 충분한 것이었다. 막부타도의 에너지, 즉 명치유신의 에너지는 존왕양이론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사진도 없이 시작한 혁명

명치유신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존왕양이였다면, 명치유신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대단히 보수반동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로 치자면 「위정척사(爲政斥邪)」의 대표격인 최익현이 정권을 잡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존왕양이라는 슬로건으로 막부타도의 에너지를 극대화시켜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사람들은, 천황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단 한 가지 일만을 제외하고는 1백80도 돌변한다. 양이는커녕 서양 오랑캐에 철저히 협력하고, 심지어 서양 오랑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일본의 국민성은 눈 앞에 닥친 일을 하나씩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가는 매우 현실적이다. 일본은 장기적 비전이나 철학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그때 그때 최선의 것을 선택해나가는 타입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선택이 쌓여서 큰일을 성취하기도 하고, 군국주의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명치유신도 한 가지씩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큰일을 성취해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명치유신은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막부를 타도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청사진도 없이 시작됐다. 뚜렷한 지도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규슈 지역의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이 중심이 됐지만, 번주(영주)가 전면에 나선 것도 아니었다. 명치유신의 리더들은 사무라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낮은 지방 사무라이 출신이거나 관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번주들을 움직여 막부를 타도하는 데 성공한다.

막부 타도의 최대 공신은 도쿠가와 가문의 마지막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인지도 모른다. 막부군은 몇 차례 전투에서 패했지만, 그 막강한 군사력은 아직 건재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시대의 대세를 읽고 미련없이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했고, 2백40년을 이어온 도쿠가와 막부체제는 붕괴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장래에 대한 청사진 없이 막부 타도에 성공한 지도자들은 외적을 막는다는 다음 단계의 과제를 안았다. 그들은 무사출신답게 손자병법에 따랐다. 지피지기후(知彼知己後)에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던가, 명치유신의 지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 나라의 일은 팽개치고 구미로 출발했다.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쇄국 하에서도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와 교역을 계속해왔으며, 이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세상 물정에 완전 까막눈은 아니었다. 난학(蘭學)이라 하여, 네덜란드(和蘭)의 문물을 연구하는 학문도 있었다. 난학자들 중에는 서구 문명을 수용해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적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도 나왔다.

양이운동의 선봉에 서서 막부와는 물론 일본에 진출한 열강들과도 격렬히 충돌한 조슈 번은 그 와중에도 몇몇 유능한 청년을 은밀히 영국으로 보냈다. 그 중 한 명이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 당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이토 등은 유럽에 와서 그 부강함에 압도됐고, 양이운동의 무모함을 깨달았다. 이들은 조슈가 열강과 충돌할 경우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귀국하여 사력을 다해 번의 방침을 바꾸었다.

천황제는 국민통합의 수단

1868년 출범한 명치정부는 서양 문물을 시찰하기 위한 대규모 견학단을 파견했다. 이를 통해 명치 지도자들이 내린 결론은 압도적으로 강력한 서구 제국주의를 물리치려면 일본도 철저하게 서구를 모방해서 「근대 국민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진 유럽제국에 뒤지지 않는 근대국가만이 식민지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은 명치 일본의 길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견학단이 보고온 서양 제도와 법률은 차례차례 새 나라 일본에 적용됐다. 헌법과 육군은 프러시아를, 해군은 영국을, 민법 형법과 경찰은 프랑스를 각각 요즘 말로 벤치마킹(benchmarking)해서 도입했다.
그러나 명치 일본이 근대화된 국민국가로 거듭나는 데에는 중대한 걸림돌이 있었다. 겉모습만 서구화된다고 해서 근대 국민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드웨어를 움직이려면 소프트웨어도 바뀌어야 한다. 즉 법률과 제도가 바뀌어도 국민이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수천년간의 봉건제도에 익숙해진 일본 국민이 새 정부의 선진 제도와 법률에 따라 움직일 리 없었다. 요는 시민의식의 성숙이 필요했다.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려면 시민의식 발달과 국민적 통합을 의미하는 「국민형성(naton-building)」이 필수적이다. 구미 열강을 견학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명치유신 지도자들은 구미 선진제국에서 교회가 국민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유럽의 기독교와 같은 역할을 일본에선 천황제가 수행할 수 있음에 주목했다. 오쿠보와 이토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천황을 정치의 정점으로 부활시킴으로써 국민통합을 위한 상징으로 활용한 것이다.

일본은 건국 이래 전근대적 봉건사회였고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명치유신 직전에는 장군을 정점으로 2백70명의 번주인 다이묘(大名)가 있었으며, 그 밑으로 1백90만명의 사무라이 계급, 그 아래 평민과 천민이 있었다. 시민의식과 국민통합을 이루기가 어려운 체제였다.

천황제는 막부를 타도하는 데에도 유용했지만, 신분차별을 없애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데에도 유용한 것이었다. 천황 앞에서는 모두가 신하다. 장군도, 다이묘도, 사무라이도, 농민도, 상인도, 천민도 모두 천황의 신민이 된다. 소위 일군만민(一君萬民) 사상이다. 천황을 정치의 정점에 서게 함으로써 신분의 귀천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한 신민이 됐고, 여기서 근대국가에 부응하는 시민의식과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성공 원동력

또 한 가지, 명치 일본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은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이었다. 명치유신 직후에 대규모 해외 견학단을 파견한 데에는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모색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동양에선 도덕이 법보다 우선했다. 그러나 서양에선 법이 도덕에 우선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면서 법대로 죽음을 택했다. 유교적 가치관에서는 대의명분을 우선시해서 대의에 어긋나는 일에 저항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불평등 조약이 대의에 어긋난 이상 이에 저항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일본은 유교권 국가이면서도 묘하게도 도덕보다 법이 우선되는 사회였다. 일본도 주자학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학문으로서 수용했을 뿐 조선처럼 사회를 속박하는 보편적 사상이 아니었다.

우선,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에는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의도도 작용했지만 일본측의 문제도 있었다. 바로 여기서 개선의 여지가 생긴다. 예를 들어 불평등조약의 대표적 사례가 치외법권인데, 외국인이 일본에서 죄를 범해도 국내법으로 벌을 줄 수가 없었다. 재판제도, 수형제도, 태형, 사형 등에서 일본은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전근대적인 형법체제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식한 명치 일본은 삼권분립에 의한 근대적 헌법, 프랑스식 형법 등을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명치 일본이 조약 개정에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지금도 일본 외무성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를 대외 조약을 다루는 조약국에 배치하는 전통에서 알 수 있다. 일본 외무관료는 조약국을 거치지 않고서는 출세할 수 없다. 관료로서 가장 높은 지위인 외무차관에 오르려면 반드시 조약과장, 조약국장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고 전력을 기울였던 명치시대의 유산이다. 불행히도 조선정부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원동력은 무엇보다 지도세력의 철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였다. 즉 신분이 높을수록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것이다. 명치유신은 근대 국민국가를 성립시켜 일본을 식민지화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일거에 봉건사회를 부정한 혁명이었다. 봉건제가 일시에 부정됐기 때문에 명치유신으로 이익을 본 계급이 없으며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례로 명치 지도자들은 중앙집권체제를 도입하기 위해서 번을 폐하고 현으로 대치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했다. 이로써 번주 다이묘들은 하루 아침에 대대로 물려온 영지를 잃었고, 사무라이들도 실업자로 전락했다. 또 명치정부가 도입한 조세제도는 농민들이 세금을 현물로 내는 것이 아니라 현금으로 지불하도록 한 것이었다. 경제가 성숙하지 못한 단계에서 갑자기 현금으로 세금을 내라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불만이 폭발할 듯 했지만 예외는 없었다.

명치유신을 주도했던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의 번주들과 사무라이들도 예외없이 영지를 빼앗기고 실직했다. 명치유신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에는 생활고 때문에 딸을 사창가에 파는 사람도 생길 정도였다. 명치 정부에 들어간 소수를 제외하고, 개국 공신들이 자신의 특권을 포기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봉건제도를 일거에 부정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불만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연재]21세기, 다스쓰는 조선책략③

‘모 택 동 중국’

반제(反帝)혁명 성공과 몰락
통해본 21세기 대안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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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00년 전 서세동점의 시대에 실패한 조선과 성공한 일본에 대해서 다뤘다. 조선, 일본 외에도 서구 제국주의의 표적이 됐던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노(老)제국 중국이 있다. 중국은 어떠했는가? 당시 중국은 근대 국민국가를 이루어 식민지화를 막을 수 있었던 일본과, 완전히 실패해 후발 일본의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중간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이후 거의 100년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일본에 전 국토를 유린당했다. 하지만 조선처럼 식민지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한 나라가 삼키기에 중국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조선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100년 동안 침략과 내란을 겪으면서도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서구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근대 국민국가를 이뤘던 반면, 중국은 사회주의라는 길을 통해 국민국가를 달성했다. 이번 글에서는 동아시아의 맹주 중국이 서양에 굴복하게 된 이유, 그리고 그 굴욕을 극복한 모택동의 사회주의 혁명을 평가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반쪽 개혁」

프란시스 베이컨은 인쇄술, 화약, 그리고 자석에 의해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약하던 시기에 중국에는 공자와 맹자가 있었다. 중국의 한(漢)나라는 동 시대에 존재했던 로마제국보다 거대했다. 저명한 경제사학자 알버트 포이어워커는 16세기까지 『세련된 관료제나 문화적 성취는 말할 것도 없고 농업생산성, 산업기술, 상업, 도시의 부와 생활수준 등 어떤 면에서 비교해도 유럽은 절대로 중국과 대등한 수준에 있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중국은 분명 세계최고의 문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842년 아편전쟁에서 힘없이 무너질 때 중국의 명성도 무너졌다. 인류 최고의 발명과 세계 최고의 문명을 보유한 중국이 왜 근대에 무너졌는가? 더욱이 중국은 어떻게 했기에 비교할 수도 없었던 후진국 일본에조차 굴욕적인 수모를 겪어야 했는가?

중국에 있어 근대화에 가장 큰 장애는 유교로 지탱해온 자기중심적 사상이었다. 유교적 세계관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자연적, 윤리적 질서였다. 중국인들은 중국을 인류문명의 진수로서 모든 문화, 덕, 그리고 예의 원천으로 보았다.

중국은 그런 자신이 왜 변화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상당 시간이 필요했다.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힘겹게 진압한 청조(淸朝)는 지방 한인 관료들을 중용하고 열강의 조약체계를 받아들여 다소간의 활력을 가까스로 되찾는다. 소위 「동치중흥(同治中興)」을 전기로 중국은 1860년 이후 청일전쟁 직전까지 수십년간 부국강병을 위해 절치부심했다.

한족과 만주족의 지도층이 생각한 것은 가치는 중국의 것을 유지하면서 도구로서 서양식의 무기와 기계를 들여다 「자강(自强)」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 중체서용(中體西用)」이었다. 이는 요즘을 사는 우리들도 공감할 수 있는 대응이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전근대적인 가치관의 개혁 없이 새로운 서구식 제도와 기계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소프트웨어의 개혁 없는 하드웨어만의 반쪽 개혁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제대로 실행될 수 없었다.

중국의 자강운동은 조선에서도 보았듯 배외적인 사대부층의 저항에 부딪혔다.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사사건건 유교적 사대부의 무지와 편견 때문에 방해받았다. 예를 들면, 1872년 120명의 학생들을 최초로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과정에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할 목적으로 구식(舊式) 교사와 유교적 도덕이 훼손되지 않도록 감시할 학자를 동행시켰다. 과거시험에 붙으려면 주자학 고전을 통째로 암기하고, 주자학의 바탕 위해서 정해진 형식에 따라 답안을 써야 했다(주자학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98년 6월호 참조). 「중체서용」의 뜻은 알겠지만, 서양의 최신 문물을 배워야 할 학생들에게 성질이 다른 토끼 두 마리를 잡으라고 한 것은 결국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유학사업 자체도 1881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몰락의 첫걸음, 청일전쟁

청일전쟁은 중국의 참담한 실패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청일전쟁은 중국이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분수령이었다. 청일전쟁은 가치관은 유지하되 도구만 서양 것을 들여온 중국과, 가치관과 도구 모두 서양화한 일본의 싸움이었다. 물론 청일전쟁은 가치관의 차이로 승패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적 국민국가체제와 전근대적인 봉건국가체제는 전쟁수행 능력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중국은 자강운동을 통해 서양의 기계와 무기를 도입했다. 중국은 1870년대 이후 해군건설에 착수하여 영국과 독일로부터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철제 중순양함을 도입했다.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중국 해군은 군함, 주포 등 하드웨어 면에서 일본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청일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놀랍게도 이홍장(李鴻章)의 사병과 일본의 국민군대 간 전쟁이었다. 승리를 예상한 중국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최정예인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과 격렬히 싸우고 있을 동안 남양함대 등 여타 중국 함대는 뒷짐을 진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홍장도 자신이 군함을 한 척이라도 잃게 되면 국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북양함대 사령관인 정여창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기지인 위해위(威海衛)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좁은 공간에서 발빠른 소형함 위주의 일본함대에 철저히 당하고 만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전쟁을 마치 지방의 국경분쟁을 다루듯 지방관에게만 맡겨 놓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룬 일본이 총력전을 펼친 반면, 전근대적인 봉건국가인 청조는 무기력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북양함대 중순양함들의 거대한 함포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포탄이 없었고, 그나마 있는 포탄에는 화약 대신 모래가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해군에 가야 할 자금이 서태후의 여름궁전인 이화원(?和園)을 짓는 데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내부 부패는 천명을 잃고 왕조가 붕괴하는 최대 요인이다. 부패는 또 외부 침략을 유발한다. 19세기 말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화원 호수에는 대리석으로 된 유람석 모양의 커다란 석조물이 있다. 그것이 예정대로 중국 해군의 군함으로 태어났다면 청일전쟁의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청일전쟁의 패배는 중국에는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이후 중국은 제국주의의 희생물로 전락해서 1949년 모택동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반세기 이상 침략과 내란의 혼돈에서 수많은 목숨과 재산을 잃어야 했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반쪽짜리 자강운동으로는 서세동점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줬다. 중국은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근대 국민국가로 전환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의 유교는 사회체제 그 자체였으며, 이것을 하루 아침에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유위(康有爲)는 지배계급의 신앙인 유교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공자는 옳지만 유교 경전들은 후세에 대부분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을 버려야 한다는 우회적인 논리를 펼쳤다.

중국이 유교적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청조가 몰락한 후 1919년 5·4운동에 의해서였다. 『광인일기(狂人日記)』의 노신(魯迅)은 유교문화가 『다수의 불행을 대가로 승리를 거둔 주인에게 봉사하는 문화』라고 지적했다. 노신의 생각은 당시 학생과 지식층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베이징대학 학생지도자들은 『공자의 말씀은 나라를 멸망시킨다. 유교는 노예에 대한 모럴이다』라고 하여 유교적 가족제도의 구속을 노예제도에 비유, 신랄히 비난하면서 개인주의의 가치를 찬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국난을 수습하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다.

동아시아의 왕조사, 특히 중국의 왕조사는 일정한 패턴에 입각한 흥망성쇠의 반복이었다. 왕조는 군주가 하늘(天)로부터 백성의 통치를 명받아 성립한다. 그러나 왕조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수백년의 수명이 다하여 쇠약해지면서 통치능력을 잃게 된다. 이 시기에는 거의 예외없이 관리가 부패하여 가렴주구가 성행하며, 결국 많은 농민들은 농지를 버리고 유민이 된다. 더욱이 기아로 유민 수가 폭증하면, 도처에 유민단이 형성돼 식량이 풍부한 지역으로 흘러간다. 굶주린 약탈자들의 집단인 셈이다.

최후의 승자, 모택동

유민단이 커지면서 지도자가 나오며 그가 바로 난세의 영웅이다. 항우와 유방, 삼국지의 유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등이 모두 이런 부류의 영웅이었다. 유민들이 영웅에게 바라는 일은 먹는 일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못하면 영웅이 아니다. 여러 유민단의 영웅 중에서 약탈 차원에서 벗어나 유민들을 잘 먹이고 규율을 만들어 공평하게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퍼지면 민심을 얻게 되고 그 세가 불어나 결국 천하를 잡게 되는 것이다.
청나라 말기의 상황도 이와 유사했다. 청조의 부정부패는 민란과 외세 침입을 불렀으며, 청조 붕괴 후 반세기 가까이 내란에 처해 도처에서 영웅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영웅들의 각축은 오랜 내란과 혼란 속에서 장개석과 모택동, 두 영웅의 싸움으로 좁혀졌다. 항우와 유방의 예에서도 그랬듯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국민당의 장개석은 민심을 얻는 데에 실패한 반면 공산당의 모택동은 유방처럼 중국 국민의 민심을 얻어 천하를 취했다.

모택동의 방법은 사회주의로 표방됐지만, 중국 고래의 방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스탈린과 중국의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공장 노동자와 도시를 중심으로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모택동은 생각이 달랐다. 마르크시즘 책보다 중국 역사서를 탐독했던 모택동은 중국 역사의 원동력이 농민봉기에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반란은 농촌에서 시작됐다. 전제정권을 쓰러뜨린 것은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이렇다 할 산업시설도 없고 전근대적인 중국사회를 볼 때, 중국역사를 만드는 자는 농민이지 지식인이나 공장 노동자가 아닌 것은 자명했다. 모택동은 20세기 중국혁명의 원동력 역시 농민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관점과는 달리,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지침과도 달리, 모택동은 농촌을 거점으로 삼아 혁명을 시도했다.

모택동의 방법은 간단했다. 농민의 희망과 요구에 따르는 정책을 취한 것이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가혹한 세금과 부채를 없애줌으로써 농촌을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으로 만들어갔다. 모택동은 장사(長沙)의 깊은 산속에서 농촌 근거지를 만들어 장개석군에 대한 게릴라전을 펼치는 동시에 농민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면서 착실히 「해방구」를 넓혀갔다.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도시중심의 공작에 집착하던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장개석의 강력한 토벌로 사실상 붕괴됐으며, 그 기반은 모택동의 농촌 외에는 남지 않게 됐다.

중국 공산당이 장개석에 의해 괴멸적 타격을 입고 대장정의 굴욕을 당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승자가 된 것은 중국 국민의 95%를 점하는 농민들의 민심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나 농민은 모택동의 편이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중국 역사의 다이내미즘을 이해한 모택동의 승리였다. 모택동은 중국의 고전적 혁명노선에 따라 거의 1세기 동안 폭정과 외세침략, 그리고 내란으로 신음하던 중국 인민을 구했다. 그리고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시켰다. 그것은 일본의 명치유신에 버금가는 모택동 혁명이었다.

1949년 10월1일 천안문 광장에 선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언하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모택동의 뒤에는 그와 함께 중국혁명을 이룩한 역전의 용사들이 서 있었다. 주덕, 주은래, 유소기, 팽덕회, 등소평 등이었다. 중국 인민들은 어느 누구도 신생 공화국의 희망찬 미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빗나갔으며,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었다.

혁명을 달성하는 데에 있어서 모택동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49년 이후 중국이 필요로 하는 신중국 건설을 추진할 지도자로서는 적절한 인물이 아니었다. 모택동은 타고난 혁명가이자 반란의 명수이며 선동가였다. 그러한 그에게 신중국이 요구하는 행정, 경제, 문화상의 기술적 문제들에 대한 이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신중국 건설의 모든 문제를 대중의 지지를 동원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반란으로 해결하려 했다. 신생 공화국은 출범했지만, 중국에는 공업과 농업생산이 정체하고 좀처럼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됐다.

헐벗은 「무소유 공산사회」

신중국 건설의 선두에 선 모택동은 인민을 총동원해 난국을 돌파하는 특유의 혁명적 방법을 동원했다. 소련이 수년 내 공업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는 흐루시초프의 허풍에서 힌트를 얻은 모택동은 1958년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소위 「대약진운동」의 시작이었다. 대약진의 광기가 중국을 지배할 무렵, 15년이라는 목표는 4년으로 단축됐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은 특유의 대중동원을 통해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공업과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봉건적 후진사회인 중국을 빠른 시일내에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었다. 우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촌에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설치했다. 인민공사는 완전한 평등주의에 입각한 농업공동체로 농민의 사유재산은 모두 공사의 것이 되며, 막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는 한편 모든 수입은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중국농촌 풍경은 하루 아침에 변했다. 펄벅의 『대지』에서 보았던 전통적 중국 농촌과 가족의 해체였다. 5억의 중국 농민은 조상 대대의 재산을 처분하고 2만6천여개의 인민공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됐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했다. 살고 있던 집들도 부수고 그 재목으로 공동막사를 지었다. 무소유의 이상적인 「공산사회」가 마르크스와 레닌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가난한 중국농촌에서 한때 실현됐던 것이다. 모택동은 한 메모에서 『레닌은 뒤떨어진 나라일수록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올바르지 않다. 경제가 뒤떨어질수록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수월하며 사람은 가난할수록 혁명을 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 농촌에서 실현된 무소유의 공산사회는 진정 파라다이스였는가?

한편 공업생산에서는 우선 철강의 비약적 생산 증대를 추진했다. 특히 1년내 철강생산을 두 배로 늘린다는 목표가 잡혔다. 이를 위해 모든 마을에 원시적 용광로인 토법로(土法爐)를 만들게 했다. 불과 3∼4개월만에 100만개 이상의 토법로가 건설됐다. 중국 전역은 붉게 타오르는 용광로 불빛으로 밤마다 장관을 이뤘다.

또 한 가지, 대약진 운동에서 모택동은 도시와 농촌의 「4해(害)」, 즉 파리 모기 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모든 국민이 동원됐다. 왜 참새가 포함됐는지는 모르지만, 참새잡이 모택동 전술은 기발함을 넘어서 소름이 끼친다. 전국민이 전국적으로 총동원돼 참새가 땅에 앉지 못하도록 쉴새없이 소리를 쳐서 쫓는다. 앉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참새는 그만 지쳐 떨어져 최후를 맞게 된다. 대약진운동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4해 퇴치운동」이었다.

4300만명을 굶겨죽인 대약진운동

대약진 운동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58년 가을 들판에는 곡식이 넘쳐 대풍이 들었고 용광로에서는 엄청난 철이 쉴새없이 생산됐다. 이대로 간다면 15년이 아니라 4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는 것도 가능해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분명히 대풍이라고 했지만, 인민공사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질과 양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에도 물품과 식량부족이 초래됐다. 그리고 겨울부터 재앙이 찾아왔다. 1958년 중국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이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8년은 풍년이었다. 그러나 곡식들은 대부분 거둬들이지 못한 채 썩어갔다. 건장한 마을 청장년들은 모두 용광로에 매달려야 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방 지도자들은 모택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했다. 생산량에 따라 세금이 정해졌기 때문에 농민들은 엄청난 세금을 치러야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생산된 곡식을 모두 세금으로 내는 바람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곳도 있었다.

더욱이 세금으로 거둬 들인 곡식은 빚을 갚기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기근이 초래되는 와중에도, 모택동은 곡식을 소련으로 보냈다. 자신의 인민공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흐루시초프가 아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은 인민공사 자체에 있었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일할 의욕도 생산량을 늘릴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하지 않는 옆사람과 동일한 수입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생산량은 급속히 줄어갔다.

마을마다 만들어진 용광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으며 화근이었다. 토법로는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철을 녹여 철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과했다. 인민들은 냄비, 주전자, 칼, 수저, 난로, 도끼, 삽, 가래, 금고, 자물쇠, 심지어 트랙터까지 모든 철을 용광로 속에 던져버렸다. 여기서 얻은 철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용광로를 지피기 위해 집집마다 가구와 문짝을 태웠고 급기야 숲을 태워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산이란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변했다.

실로 중국 농촌은 자멸을 향해 매진했으며, 중국은 철기시대에서 석기시대로 퇴화했다. 농민들은 밭을 일굴 농기구가 없었다. 대기근이 찾아왔다. 인재였다. 아프리카에서 보던, 뼈만 남고 배가 불룩한 어린이들과 굶어죽은 시체를 1959년의 중국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최소한 3,000만명, 많게는 4,300만명이 죽었다는 추정도 있다. 한국 국민이 모두 굶어 죽은 셈이다. 그 끔찍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생명은 희생돼야 한다』고 했다.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은 5∼7%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공포의 문화혁명

대약진 운동이 실패한 이후 모택동은 또 하나의 혁명을 꾸몄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유소기, 등소평 등 모택동의 충실한 부하들은 보스가 초래한 미증유의 혼란을 잡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초토화된 농촌과 중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그들은 광적인 성장목표를 정상화시키고 농업집단제를 대폭 완화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갔다.
그러나 모택동은 인민들이 잠시도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인민들이 겨우 먹을 수 있게 된 단계에서 그는 생산체계를 다시 뒤죽박죽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충직스러운 부하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인간사냥에 나섰다.

문화혁명은 1965년 11월 강청(江靑)의 수하인 상해의 이론가 도문원이 「문회보」에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에 의해 시작됐다. 「해서파관」은 북경 부시장 오함(吳?)이 쓴 희곡이다. 해서는 명대의 충신으로 폭군이었던 황제의 잘못을 용감하게 직언하고 충성을 다한 인물로, 모택동은 해서를 본받으라고 장려하기까지 했었다. 오함도 해서를 본받으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해서파관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모택동이 친 덫이었다. 모택동은 과거에도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주창하여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적들을 비판하도록 하여 그들을 숙청하는 데 활용한 적이 있었다. 충신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하고 고초를 당했듯이, 팽덕회도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모택동에 의해 숙청당한 바 있었다. 많은 당간부들은 팽덕회가 해서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때가 온 것이다. 모택동과 강청 일파는 「해서파관」은 우익분자 팽덕회를 숙청한 모택동을 해서에 빗대 비난하는 것이며, 그 배후에는 유소기 등소평 등 당 지도부가 연루돼 있다고 뒤집어 씌웠다.

모택동이 그의 충직한 당 지도부를 파괴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9살에서 18살에 이르는 초중고의 어린 학생들, 소위 「홍위병(紅衛兵)」이었다. 「백가쟁명」 때 지식인들은 정적들을 비난해주었지만, 모택동도 비난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그들은 사리를 판별할 눈이나 비판능력도 없으며 단지 맹목적이었다. 모택동은 이 점을 활용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가장 믿을 만한 동지이며, 이들만이 낡은 정치세력과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모택동은 1966년 가을 천안문에 여덟차례나 오르며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만의 홍위병들에게 반란을 획책했다. 모택동은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제하의 대자보를 통해, 당 중앙과 지방정부의 「어떤」 동지들은 부르주아 독재를 강화하고 문화혁명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지적하면서 당 사령부를 폭파하라고 했다. 모택동은 정상적인 당 및 정부조직을 무시했고, 무정부 상태가 도래했다.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당 사령부와 사구를 폭파하기 위해 쏟아져 나왔다. 위대한 모주석이 지지하는 그들은 더 이상 선량한 학생들이 아니라 지옥에서 온 야차들이었다. 그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누구든지 외국이나 지성의 냄새가 나면 구타당하고 심문을 받아야 했다. 재수가 없으면 목숨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농촌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 소실의 자식이거나 금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이웃이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한 자 등 아무 죄가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가조직은 완전히 와해됐다.

제2인자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백주에 사무실에서 홍위병들에게 붙잡혔다. 경호원들도 못본 체했다. 등소평도 붙잡혔다. 부인과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위 「비투대회(批鬪大會)」에 끌려가 굴욕적인 자세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유소기는 결국 모진 고문 속에 살해됐다. 등소평의 장남은 북경대에서 홍위병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4층에서 던져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홍위병의 만행

서방인들은 공산세계에서 사람들이 범하지도 않은 죄를 왜 자백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의 박헌영, 이강국도 자신이 미국의 스파이라고 자백했다. 서방의 궁금증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에 의해 풀렸다. 『bei, bei, bei』, 즉 『때려, 때려, 때려』였다.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중국 문제에 정통한 저널리스트 해리슨 솔즈베리는 모택동 홍위병의 잔학성을 가리켜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도, 아르헨티나의 파시스트도, 스탈린의 비밀경찰도 모택동의 홍위병에게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청소년들을 종종 동원했다. 히틀러의 유겐트도 홍위병과 마찬가지로 지도자를 숭배하고 그가 바라는 대로 무엇이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태인이나 일반인들을 폭행하고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살인은 하지 않았다.

한편 낡은 것을 없애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들은 파괴되고 책은 불태워졌다. 심지어 중국 고전극인 경극의 가면과 의상도 불태워지고 배우들도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얼마나 많은 인류유산이 문화혁명 중에 파괴됐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시간이 감에 따라 모택동조차도 홍위병을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됐다. 국가주석이 백주에 붙잡히는 판에 국가기관이 무사할 리 없었다. 홍위병들은 중국 외교부를 점령 폭파했다. 그들은 외교문서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소련, 영국 등 외국 대사관에 침입해 방화했다. 외교부장 진의는 자아비판을 해야 했으며 고문을 당해 결국 죽었다. 외교부를 점거한 그들은 해외의 중국 대사관들이 혁명을 선전하고 지역 공산주의를 선동하는 역할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로 인해 중국대사들은 대부분 소환됐고 몇몇 국가들은 중국과 단교했다. 대외 무역은 급격히 감소했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다른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모택동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했다. 그리고 68년 7월 홍위병을 해산시키고 1000만 홍위병을 모두 농촌으로 하방(下放)시켰다. 홍위병 세대는 지금도 중국의 골칫거리다. 오십줄의 그들은 한창 공부할 나이에 농촌에서 똥거름을 치며 지냈다. 홍위병이 제거된 이후에도 76년 9월 모택동이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의 광기는 계속됐다.

약 1억의 중국인이 문화혁명 때에 모진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대약진 운동과 마찬가지로 모른다. 모택동으로서는 국가를 공포정치하에 둠으로써 반대세력을 압살하고, 절대권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만 달성된다면 몇백만, 몇천만의 무고한 민중이 죽어도 문제되지 않았다.

모택동은 현대의 진시황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날들을 커다란 침대 위에서 중국 고전들을 읽거나 10대 소녀들과 섹스를 하면서 살았다. 임표의 불발 쿠테타 발기문에는 모택동을 가리켜 『인민이 부여한 신임과 지위를 남용해 마침내 현대의 진시황이 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의 허울을 빌려 진시황의 법을 집행하는 중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고 했다. 모택동 연구의 권위자 런던대의 스튜어트 슈람은 모택동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모택동은 영원한 반역자이며, 신의 법이든 사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마르크스주의 법이든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민을 30년간에 걸쳐 하나의 비전 추구로 이끌었다. 그 비전은 처음에는 웅대했지만, 점차 망상이 되어 드디어 악몽이 되었다. 용두사미이며 무참한 결말이다』

모택동이 초래한 상처 투성이 중국을 회복시킨 것은 등소평이었다. 그는 참으로 오뚝이 같은 정치인으로 문화혁명의 와중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권력을 잡았다. 『검정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 따라 시장원리와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하여 모택동 때문에 초토가 되고 뒤죽박죽이 된 중국을 되살렸다. 무엇보다도 인민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했다. 그야말로 중국 역사에서 보는 진정한 영웅인 셈이다.

사회주의는 대안 아니다

21세기를 향한 우리의 책략을 모색하는 글에 필자가 왜 장황하게 모택동의 사회주의 혁명을 다루었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길이 혹시 21세기 우리의 선택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다. 중국의 비극을 모택동 개인의 성격 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를 택한 나라들에서 비극은 보편적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련의 비극은 스탈린 개인의 문제이고, 캄보디아의 비극은 폴 포트의 개인 문제만은 아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사실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안티 테제」로서 휴머니즘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으로 세계의 수많은 이들을 매료시킨 사상이다. 20세기는 흔히 공산주의의 광기가 지배한 시대라고 한다. 인류역사상 공산주의만큼 불과 한세기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내에 각광받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는 동시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고, 마침내 열병처럼 극적으로 사라진 사상은 없었다. 우리도 그 열병으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겪었다.

사회주의는 왜 단명했는가? 그것은 사회주의의 출발이 휴머니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이던 자본주의는 인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법과 제도를 통해 이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진화된 반면, 인간적이어야 할 사회주의는 공포와 테러를 통해 퇴화해버렸다. 사회주의 북한에서도 200만의 동포가 기아로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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