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리더에게는 시스템 설계능력이 필요하다! 작성자 중앙일보 이메일 홈페이지 조회수 6236 등록일 2006/4/14 (20:14) 2006년 4월 14일 (금) 05:12   중앙일보 '아래로' 공천권 이양 실험 '아래의' 부패로 결국 실패 [중앙일보 최상연.강주안.오종택]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13일 하루 종일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말도 아꼈다. 김덕룡.박성범 의원의 공천 비리를 거듭 묻는 기자들에게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죠"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측근들은 "박 대표의 심기가 정말 불편하다"며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고 전했다. 박 대표는 그동안 "투명하고 깨끗한 공천에 문제가 생기면 일벌백계로 징계하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다. 그는 "지방선거 공천은 한나라당이 처음으로 하는 개혁적인 공천이며, 개혁공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돼야 정치가 발전하고 정치개혁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면서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낙인찍힌 '차떼기 당'의 이미지를 지방선거 공천 과정에서 털어버리자"고 주문했었다. 5.31 지방선거 공천은 한나라당 분권실험의 첫 번째 시험대였다. 박 대표는 당 대표로서의 공천권을 포기하고 분권화했다. 새 정치를 하겠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밑으로 내려간 공천권은 잡음과 부패로 얼룩지고 말았다. 구태정치의 대명사인 공천 비리가 터졌다. 서울과 영남 등에서 높은 지지율 때문에 '공천=당선'이라는 등식이 성립한 게 화근이 됐다. 박 대표의 실험은 한순간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서 한두 건이 더 터질 경우 그의 정치개혁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이날 당장 소장파 의원 사이에선 지도부 책임론이 나왔다. "공천 과정을 엄격하게 관리하지 못한 지도부가 이 사태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당내에 공천 비리 의혹이 파다했는데도 지도부가 현실을 너무 안이하게 판단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이들은 박 대표의 리더십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여기에 당 지도부가 "김덕룡 의원이 중진 의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검찰수사 의뢰 결정을 미뤘다면 지도부 책임이지만, 투명하게 밝혔는데 왜 책임론이 나오느냐"(허태열 사무총장)고 받아치면서 당내 논란은 증폭될 조짐이다. 김덕룡 의원과의 관계도 박 대표로선 뼈아픈 부분이다. 김 의원은 석 달 뒤인 7월 당 대표 경선 때 박 대표의 대리역을 자청한 것으로 알려진 상태다. 박 대표의 지원을 업고 이명박 시장이 지원하는 이재오 원내대표와 경쟁을 벌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2년 전 당 대표와 원내대표로서 당을 함께 이끌었다. 박 대표의 굳은 표정이 더욱 굳어지게 만드는 대목이다. 대통령 후보 경선 경쟁자인 이 시장과의 힘의 균형도 급속히 깨질 수 있다. 이 시장이 이번 사태를 적극 활용할 경우 박 대표가 받을 상처가 만만치 않다. 어쨌든 당 일각에선 "공천권을 분권화한 것은 분명히 박 대표의 개혁의지에 따른 것이지만, 분권화된 공천권이 표류하지 않고 정착되려면 공천에 관한 명확한 기준과 매뉴얼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자성론이 나온다. 중앙당에서 내려보낸 후보 평가 기준은 도덕성.사회기여도 등 대부분 주관적 내용이고, 결국 '필요한 경우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옛 지구당 위원장) 의견 청취' 항목에서 결판나도록 돼 있다는 것이다. 지역구 의원이나 당원협의회장이 사실상의 공천권자라는 얘기다. 공천권의 분권화 실험은 사실 시작 단계부터 경고음이 있었다. 한 공천심사위원은 "의원들이 서로 골치 아프다며 공천심사위원을 맡지 않겠다고 미뤄 어쩔 수 없이 참가했다"고 했다. 그는 "자기 잇속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공천심사위원이 되는 상황도 생겼다"고 말했다. 한 의원은 "어떤 외부 인사를 심사위원으로 영입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심사위원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더라"고 전했다. 심사위원 등으로부터는 "한 광역의원에게서 케이크 상자를 받았는데 돈이 있는 것처럼 묵직해 곧바로 돌려줬다"거나 "기초의원 출마자가 거액의 후원금을 냈다"는 등의 고백이 잇따랐다. 당 지도부는 잡음이 끊이지 않자 지난달 초 클린공천감찰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터지는 부정 의혹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한 달여 만에 내놓은 감찰단의 첫 작품은 한나라당의 공천 분권화 자체를 원점으로 돌리는 꼴이 됐다. 결국 박 대표의 분권정치 실험에 대한 평가는 현재로선 '낙제 점수'다. 경희대 김민전 교수는 "한국 정당 초유의 공천권 분권화 실험이 위기에 처하게 돼 안타깝지만 미국에서도 1910년대에 시작된 공천권 분권화 시도가 50년이 지난 뒤에야 정착됐다"며 "한나라당의 시도는 시도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지방선거 승리를 통해 재도약을 꿈꿨던 박 대표의 희망이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최상연.강주안 기자 choisy@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 ▶최상연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ch9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