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 미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지난 1월 2007 국제가전쇼(CES) 개막연설에서 디지털 융합이 구현할 미래의 안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디지털 융합전쟁이다. 방송사와 통신기업의 일대 접전-. 그 와중, 인터넷기업들이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 방송위와 정통부는 업계의 대리전을 치르는 양상이다. 디지털 융합의 꽃인 IPTV는 피지도 못하고 시들고 있다. 그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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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과 TV 기능 결합하면 통신 서비스 빅뱅 일어나
■'KT 주도 IPTV 상용화하면 기존 유무선 방송 위상 급변
■'방송사·통신회사 접전 불가피… 방송위·정통부 대리전 양상
■'콘텐츠 회사 vs 단말기 제조사… 새 사업방향 정면충돌
■'디지털 격차와 생산자·소비자 갈등 해소 긴요

노래방은 남녀노소가 즐겨 찾는 전 국민의 오락장이다. 무엇보다 비용이 저렴하고 주택가에까지 침투(?)해 있다. 요즘에는 영화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남녀 주인공이 노래방 반주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는가 하면, 실연한 여주인공이 자기 감정에 빠져 열창을 하기도 한다.

그 노래방이 TV 속으로 들어온다. IPTV(Internet Protocol Television) 상용 서비스를 준비 중인 KT 측은 “노래방에서처럼 TV를 보는 사람이 직접 곡을 골라 부르면 점수까지 뜬다”고 설명했다. 지상파TV처럼 일방적으로 특정 프로그램의 시청을 강요당하는 ‘푸시형’ 서비스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이용하는 ‘풀형’ 쌍방향 서비스다.

IPTV란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보는 쌍방향 TV다. 통신 쪽의 인터넷망과 방송 쪽의 TV가 만나 방송과 통신이 어우러진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해 말 C-큐브와 다음 컨소시엄이 시범 서비스를 했다. C-큐브의 주간사는 KT다.

IPTV가 상용화되면 야구경기 중계를 경기 내내 포수 뒤쪽에서 잡은 화면으로만 볼 수 있다. 멀티 앵글 서비스다. 그때그때 보고 싶은 앵글의 카메라를 선택해 가면서 스포츠 중계를 보는 것이다. 채널 수에 대한 제약이 사라지면서 가능해진 디지털 현실이다.

“디지털 융합은 두 번째 방송혁명”

또 웹 카메라만 설치하면 TV 화면을 영상전화 디스플레이로 써먹을 수 있다. 다음은 지난해 100가구를 대상으로 IPTV 시범 서비스를 하면서 해당 지역에 있는 가게의 내부를 라이브로 보여줬다. ‘우리 동네 보여주기’ 서비스였다. 일례로 특정 미용실에 지금 손님이 얼마나 있는지, 가면 바로 머리를 할 수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모두 PC 기반의 인터넷 서비스가 TV 속으로 들어오면서 예고된 변화다. TV 광고의 패러다임도 바뀔 수밖에 없다.

이광섭 미디어베이직 대표는 “누구도 대비할 수 없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TV가 VOD(Video on-demand) 서비스, 즉 주문형으로 바뀌면 타깃별로 광고시간대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프라임 타임이 바뀌는 것이죠. 저마다 필요한 것만 골라 볼 테니 누가 언제 무슨 프로그램을 접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디지털 융합(convergence)이 펼쳐보이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이렇듯 혁명적이다. 정윤식 강원대 교수(신문방송학)는 “디지털 융합, 즉 방송과 통신의 수렴은 두 번째 방송혁명”이라고 단언한다. 첫 번째 혁명은 케이블TV의 도입이었다. 디지털 융합으로 뉴스·쇼핑·게임 등 기존의 인터넷 서비스와 TV 드라마 등 동영상을 한 화면에서 접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유선전화시장이 축소된데다 인터넷 초고속망 수요마저 포화상태에 이르자 KT·하나로텔레콤·LG데이콤 등 통신회사들이 디지털 융합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디지털 융합으로 전개될 전인미답의 신천지를 놓고 벌이는 영토전쟁이다. IPTV 시범 서비스를 마친 KT 측은 IPTV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전국적으로 400만~500만 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쟁에는 전선(戰線)이 있게 마련이다. 디지털 융합의 전선은 여러 갈래다. 통신회사들이 벼르고 있는 IPTV 서비스는 그 최전선이다. 이들과 대치하고 있는 교전 당사자는 방송사들이다. 특히 방송시장에 대한 지배력이 쇠퇴하고 있는 지상파 방송사들이다. 방송사의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융합은 통신사업자의 방송 진출과 다름없다.

석원혁 MBC 뉴미디어정책팀장은 “그동안에도 방송시장이 포화인 상태에서 외주 의무제작비율 적용 등으로 지상파에 대한 억압이 계속돼 왔는데 IPTV가 도입되면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거대자본인 통신사들의 진입으로 그 양상이 자본력 싸움의 성격을 띨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다 자칫 공멸할 수도 있습니다.”


“방송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가”

MBC와 KBS의 인기 드라마 <주몽> <황진이>의 공동 제작사인 ‘올리브나인’의 1대 주주는 KT다. 이 회사는 올리브나인에 204억 원을 출자했고, 올리브나인은 KT 밸류체인(가치사슬) 상의 콘텐츠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석원혁 팀장은 “통신회사들이 외주제작사·작가·PD 등을 ‘매집’함으로써 방송권력이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IPTV는 인프라 환경이 좋아 유료 방송이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겁니다. 방송이 자본에 장악당할 수도 있어요.”

지상파 방송의 조락(凋落)은 오후 9시 뉴스 시청률에서 잘 드러난다. 1988년 MBC 33%, KBS 27%였던 9시 뉴스 시청률은 지난해 1월 MBC 9%, KBS 18%대로 추락했다.

통신회사는 왜 방송사와 전쟁을 불사하는가? 그림에서 보듯 통신회사의 주력이었던 유선전화부문은 시장 성장률이 낮은데다 시장점유율도 떨어지는 추세다. 한때의 수익원이 천덕꾸러기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이동전화는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아직은 돈이 되지만 미래 수종사업은 아니다.

경쟁이 치열한 초고속 인터넷사업 역시 성장 정체를 보이고 있다.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속절없이 사양화할 수도 있다. 이 부문을 살리기 위해 통신회사가 디지털 융합에 주목하는 것이다. IPTV는 말하자면 통신회사에 중장기적 캐시카우(돈을 벌어들이는 사업)인 셈이다.

초고속 인터넷이 성장 정체의 덫에 걸린 것은 요금을 정액으로 책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들어오는 돈은 고정돼 있는데 유지보수비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사용한 만큼 요금을 매기는 종량제로 바꾸고 싶지만 사회적 저항이 크다.

반면 새로 도입하는 IPTV 서비스는 전략적으로 부분종량제를 적용할 수 있다. 월 이용료는 정액으로 받고 일부 프로그램을 유료화하는 식으로 가격전략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가령 유료 케이블TV가 시청한 프로그램 수만큼 요금을 부과하듯 교육 프로그램은 ‘페이퍼 뷰(pay ­per ­view)’ 방식으로 요금을 청구할 수 있다.

KT가 융합 쪽에서 활로를 찾는 것은 이 회사가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KT의 외국인지분율은 지난 2월9일 현재 47.25%다. 외국 투자자들은 초고속망 고도화 등에 대한 고비용 장기투자보다 높은 배당을 원한다. ‘울타리산업’에 종사하다 보니 정부 눈치도 살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KT는 상대적으로 투자 규모가 작은 선택을 한 것이다. 콘텐츠 쪽으로 수직적 확장을 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어쨌거나 KT로서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찾은 셈이다. 융합 서비스가 캐시카우가 될지는 그러나 미지수다. 융합 시장을 둘러싼 각축은 상대방이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통신회사의 방송 진입으로 위기감이 큰 쪽은 케이블·위성 등 유료 방송이다. 강남 케이블TV 사업자(SO)가 인수·합병(M&A) 협상 때 가입자 한 사람에게 매기는 자산가치는 160만 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액수는 현존가치에 미래가치까지 반영한 것이다. 만일 IPTV가 진입하면 영업이익이 줄어들 것이다. 그에 따라 SO의 자산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 토막이 날 수도 있다.

이런 전망은 디지털 융합이 통신·방송사업자 간의 제로섬 게임이 될 개연성을 시사한다. 어쩌면 미디어시장이 강자만 살아남는 원형 투기장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에 거대기업 KT가 네트워크를 독점함으로써 거대 독점 방송사업자로 군림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영세한 케이블방송들은 KT 등의 통신회사가 독과점할 것을 경계해 이들의 방송시장 진입에 반발하고 있다.

방송사와 통신회사 간의 접전은 필연적으로 방송·통신사업에 대한 규제기관 간의 전선을 만들어 냈다. 바로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다. 지난 1월 중순 최민희 방송위 부위원장은 긴급 브리핑을 통해 “방송위·정통부 간 고위 정책협의를 통해 IPTV의 주요 쟁점에 대한 합의안을 도출하고, 이를 토대로 법률 제·개정 시안을 마련하기로 했다는 정통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방송과 통신은 울타리산업

그는 정통부에 “보도자료를 통해 밝힌 입장을 철회하고 방송위의 정책방안이 마련되면 양자 간 협의에 성실히 임해 달라”고 촉구했다. 새로운 규제법을 둘러싸고 주도권다툼을 하고 있는 규제 기관끼리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IPTV에 대해 방송위는 기존의 방송법을 확대적용하려고 한다. 반면 정통부는 새로운 융합법을 만들자는 입장이다. 방송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방송사업자의 채널을 통한 데이터 방송도 방송법의 규제를 받게 된다.

정통부는 IPTV의 실시간 방송도 융합법으로 규제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정통부가 산업적 관점에서 IPTV 서비스의 조기 활성화에 관심이 있다면, 방송위는 공익적 관점에서 공익성과 콘텐츠산업 보호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월12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손봉숙 의원은 “방송·통신 융합으로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요구가 증폭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정작 콘텐츠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며 “방송·통신 융합기구 설치법이 콘텐츠 진흥 문제는 배제한 채 방송·통신 융합과 무관한 우정업무를 끼워넣는 등 정통부와 방송위 조직을 기계적으로 결합시킨 기형적 기구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방송과 통신은 규제라는 울타리 속에서 큰 ‘울타리산업’이다. 규제 기관이 친 울타리는 사실상 암탉의 날개와 같다. 규제 기관과 규제 대상 산업, 사실상 보호 산업의 관계는 암탉과 병아리의 관계라는 것이다. 김국진 미디어미래연구소장은 “방송위와 정통부가 스스로 이윤추구 집단인 방송·통신사업자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안정적 수익이 보장되는 울타리산업은 현실에 안주하게 마련이다. 타성에 젖어 있고 마케팅도 약하다. 경쟁력이 떨어져 울타리를 제거하면 존립이 위태로울 수 있다. 이미 울타리를 걷어냈다는 통신 쪽도 예외가 아니다. KT와 SKT의 체납요금은 매년 2조~3조 원에 이른다. 이들 회사가 한 해 동안 올리는 순익에 육박하는 규모다.

이렇듯 막대한 손실을 떠안고도 그와 맞먹는 순익을 올리는 것은 요금제도가 왜곡된데다 과도하게 요금을 징수하기 때문이다. 방송은 심지어 국고 지원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산업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다.
규제 기관과 규제 대상 산업이 패밀리로 엮이다 보니 해당 사업자보다 규제 기관들이 더 이해관계에 민감하다. 방송·통신대전(大戰)이 방송위·정통부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규제 기관을 먼저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규제 기관 간의 대립이 더 첨예하기 때문이다.

전선은 콘텐츠 회사와 단말기 제조사 간에도 생기고 있다. 발단은 디지털화로 콘텐츠 간의 칸막이가 없어진 것. 텍스트와 오디오·비디오 간의 구분이 사라진 것이다. 단말기 제조야말로 융합분야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다. 국내 첫 프리미어리거 박지성 선수가 광고 모델로 출연해 화제가 된 ‘생방송 중 되돌려보는 디지털 TV 기능’은 TV에 컴퓨터의 메모리 기능을 부가한 것이다. TV와 PC의 융합이다.

단말기 제조사의 콘텐츠사업 진출은 밸류체인 상에서의 수직적 확장이다. 단말기는 콘텐츠-패키징-네트워크-단말기로 이루어진 밸류체인의 마지막 단계에 놓여 있다. 애플이 자사 MP3 제품 ‘아이팟’을 팔기 위해 아이팟으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음원 사이트 ‘아이튠’을 운영하는 것이 좋은 예. 치열한 산업 내적 경쟁을 우회하기 위해 단말기 제조사가 콘텐츠를 끼워 팔고 있는 것이다.

단말기산업은 울타리산업이 아닌데다 종사 기업의 자본력이 세다. 콘텐츠회사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단말기 제조사의 콘텐츠시장 진입은 콘텐츠의 질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

디지털 융합은 미디어 수용자, 즉 콘텐츠 소비자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다양한 콘텐츠 공급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선택적으로 소비함으로써 소비자가 미디어 환경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미디어권력’의 이동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은 콘텐츠의 질이 높아지고 가격이 내릴 때 의미가 있다.

▶지난해 11월 KT가 선보인 IPTV 시범 서비스. 방송을 보다가 다른 곳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채팅을 할 수 있다.

콘텐츠의 질 향상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불필요한 융합형 단말기와 쓸데 없는 콘텐츠에 도리어 지갑을 털릴 수도 있다. 미디어 관련 지출은 늘었는데 소비자의 욕구 충족 수준은 제자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이블·위성방송의 채널이 다수라고 해서 그에 비례해 욕구가 채워지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칫 생산자 그룹과 소비자 간에도 전선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디지털 융합이 소비자에게 ‘복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김국진 소장은 “융합형 단말기와 그에 실린 콘텐츠가 팔려 경제가 잘 돌아간다면 공급자의 시각에 포획된 것”이라고 말했다.

“질 낮은 디지털 융합 서비스에 기회비용을 투입하는 것은 전반적인 국민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디지털 융합과 관련해 국가차원의 전략과 정책이 필요한 까닭이다. 시장에서 해결이 안 되면 정부가 정책적으로 개입하는 길밖에 없다. 정부 부처 간에 영역다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디어 환경도 양극화 가능성

우선 유관부처를 대대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 특히 콘텐츠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부가 콘텐츠를 전담하는 부처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김 소장은 “문화부는 문화 콘텐츠부나 소프트웨어산업을 관장하는 문화산업부로 개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관광부는 관광·종교 등 본령에서 벗어난 업무를 떼어내고 문화콘텐츠부가 돼야 합니다. 관광은 관광청으로 독립시킬 수 있겠죠. 하드웨어산업은 기존의 산업자원부가 맡고 소프트웨어산업은 문화산업부로 개칭해 문화부가 관장하는 방안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존의 규제 기관보다 문화부가 우위에 서야 합니다.”

디지털 융합은 디지털 디바이드를 가중시킬 수도 있다. 디지털 융합으로 정보 격차가 심화돼 계층 간 긴장이 고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 환경의 양극화요, 디지털 융합이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전선이다.
이르면 2010년 방송이 디지털화하면 아날로그 TV로는 아예 시청을 할 수 없다.

디지털 TV를 들여놓든지 디지털 방송을 아날로그 신호로 전환해 주는 셋톱박스를 설치해야 한다. 디지털화의 편익이 저소득층에게는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소득층에게 셋톱박스를 무상 지원하는 방안이 있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 결과 한쪽에서는 미디어를 쌍방향으로 활용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미디어 주권이 ‘있는 사람들’만 누리는 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말기 제조사가 저가의 디지털 TV를 만들게 하려면 결국 정부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미디어 환경이 미디어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방증이다.

강상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는 “국가적으로 미디어 정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때”라고 말했다.

“기술·산업의 논리와 공공성, 문화적 가치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변화는 또렷이 보이는데 문화적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다 보니 기술·산업논리가 힘을 받고 있죠. 기술·산업논리가 경제논리로 발전하고, 논의의 장이 국가경제로 옮겨가면 사뭇 혼란스럽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향할 가치, 21세기 우리가 이루어야 할 발전에 대해 합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김국진 소장은 올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선 주자들이 미디어정책 전반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미디어정책에 대한 입장표명을 꺼리는 것은 자칫 미디어 장악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미디어 환경의 양극화를 타개할 복안은 무엇인가?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국민은 과연 어떤 미디어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가? 글로벌 시대 한류는 문화 콘텐츠로 승화할 것인가? 한국시장은 거대기업의 테스트 베드 역할에 머무를 것인가? 대한민국의 비전을 제시해야 할 대선 주자라면 이런 정책에 대한 지평도 보여줘야 한다.

통신회사는 늘 새로운 미디어를 갈구한다. 와이브로 서비스도 그래서 도입됐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도 되는 양 환호했던 와이브로는 지금 사업자가 포기를 검토할 만큼 어렵다. KT의 경우 와이브로 사업에 지난 2년간 4,500억 원을 투입했지만 가입자는 2,000명이 채 안 되는 실정이다.

융합 서비스는 과연 성공할 것인가? 관건은 콘텐츠다. 과거 일방향적 콘텐츠는 시간대별로 편성됐다. 쌍방향으로 제공되는 디지털 콘텐츠는 반면 공간 편성을 한다. 전자가 상영시간이 정해져 있는 영화관이라면, 후자는 아무 때나 들러 필요한 책을 고를 수 있는 도서관이다.

도서관을 채우는 데는 영화관의 스크린을 채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콘텐츠가 필요하다. 콘텐츠에 이미 많은 투자가 돼 있는 미국·일본 등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요즘 젊은 세대는 외국 콘텐츠를 탐닉한다. 특히 미국 드라마를 즐기는 층이 급증하고 있다. 일명 ‘미드족(미국드라마족)’이다.

관건은 콘텐츠의 강화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인 이들 가운데 일부 마니아는 미국 드라마를 현지에서 방영된 지 몇 시간 만에 한글 자막을 입혀 인터넷을 통해 유포한다. 이들 덕에 미드족은 미국 현지인들과 거의 시차 없이 미국 드라마를 접한다.

이성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네트워크와 콘텐츠의 관계를 도로와 차에 비유했다.

“도로는 누군가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전면개방하고 확장도 해야죠. 물론 그 목적은 차가 잘 달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네트워크를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양질의 콘텐츠를 실어나르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그런데 지금은 콘텐츠보다 네트워크 기반을 닦는 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위성DMB가 고전하는 것도 콘텐츠가 부족해서입니다.”

고화질의 쌍방향 콘텐츠를 제대로 확보하지 않은 채 전송 인프라만 개선해서는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콘텐츠산업과 네트워크산업은 서로 견인하면서 발전한다. 양질의 콘텐츠가 수요를 창출해 수요초과 상태가 되면 차세대 네트워크가 공급을 확대해 그 간극을 메워 주는 식이다. 콘텐츠와 네트워크 두 산업 중 어느 한쪽이 이익을 독점하면 다른 한쪽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어 해당 서비스의 매력이 떨어진다. 결국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게 마련이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은 수직적이었던 관련 산업의 구조를 수평적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야기할 것이다. 유선방송을 예로 들어 보자. 현재 SO는 방송채널사업자(PP, Program Provider)에 대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소비자로서는 SO가 제공하는 방송 채널을 통해서만 해당 방송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면 콘텐츠와 네트워크가 수평적으로 분화한다. 특정 정보 서비스가 특정 경로에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유선 인터넷 통신 부문에서는 이미 이런 분화가 일어났다. 이용자가 어떤 통신사업자를 이용하든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방송·통신 융합으로 이런 수평적 구조가 형성되면 케이블이든 초고속 인터넷이든 어느 네트워크를 통하든 모든 방송과 인터넷 사이트, 즉 모든 콘텐츠에 도달할 수 있다.

콘텐츠를 강화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콘텐츠 쪽으로 돈이 흘러들어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콘텐츠가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콘텐츠 최저요금제를 도입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SO 등 플랫폼사업자로 하여금 기금을 조성해 수익금의 일부를 콘텐츠에 투자토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콘텐츠와 콘텐츠 기술(CT)에 대한 투자로 정책방향을 바꿔야 한다. 정보기술(IT)이 아니라 CT다. 월트 디즈니가 창조한 미키마우스는 그의 사후에도 연간 6조 원을 벌어들이고 있다. 상상 속의 쥐 미키마우스가 거액을 벌어들이던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는 쥐 잡기 캠페인을 벌였다.

한국사회는 11년 후인 2018년 65세 이상 노령인구비율이 14%에 이르는 고령사회를 맞는다. 이 해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층 진입으로 우리 사회는 ‘아이보다 노인이 많은 나라’를 예약해 놓고 있다.

노인들에게 책 읽어 주는 채널 나올 수도

2000년에는 이미 고령화사회(노령인구비율 7%)에 들어섰다. 융합 미디어는 고령층이 주류 세대로 떠오른 고령화사회에 들어맞는 미디어 모형이다. ‘육체적 장애인’인 노인들의 미디어 욕구를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볼 만한 책을 읽어 주는 채널도 나올 수 있다. 융합을 통해 육체적 장애로 인한 단절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왕에도 노년층은 TV의 열혈 팬이었다. 그런 노년층이 인터넷문화의 소비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융합의 정신은 사실 공유다. 방송과 통신이 콘텐츠를 공유하고, 나아가 시장도 공유하자는 것이다. 공유의 관문을 통해 공정하게 경쟁하는 시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벽을 허물고 울타리를 걷어내려면 룰이 필요하다. ‘동일 서비스, 동일 규제’는 이런 룰을 규정하는 대원칙이다.

결국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맞는 공정한 규제 틀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규제 기관의 통합은 이를 담보할 수 있는 조건이다. 융합의 하모니는 결국 공정한 경쟁으로 융합을 둘러싼 모든 전선이 사라질 때 비로소 울려퍼질 것이다.

디지털 융합의 최전선 IPTV

“KT ‘1분기 법제화, 하반기 상용 서비스할 것’…사업 성공하면 해외시장도 노릴 만” ▶KT가 선보인 IPTV 시범 서비스 화면. TV 화면을 통해 계좌이체를 할 수 있다. IPTV(Internet Protocol Television)는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보는 쌍방향 TV다. 대표적인 방송·통신 융합 서비스다. VOD(Video on-demand), 즉 주문형 비디오 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에 골라서 볼 수 있을뿐더러 실시간으로 기존의 TV 프로그램을 볼 수도 있다. 메일·메신저·영상전화·홈쇼핑·홈뱅킹 등도 이용할 수 있다. 멀티미디어의 디지털화, 압축기술의 발전 등으로 화질도 HD(High Definition)급 고화질이다. IPTV를 보기 위해서는 인터넷 회선이 연결돼 있어야 하고, 텔레비전 외에 셋톱박스가 필요하다. 리모컨으로 조작하기 때문에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인터넷이 제공하는 다양한 콘텐츠와 부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쌍방향 홈쇼핑 같은 것은 방송·통신의 융합으로 출현한 새로운 서비스다. IPTV는 광고방송 중에도 해당 방송 채널사업자(PP)와 쌍방향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일종의 맞춤형 광고다. IPTV 서비스는 2002년 영국에서 처음 상용화됐다. 본격적인 서비스가 시작된 것은 2004년께. 세계적으로 가입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프랑스다. 특히 스페인과 미국에서 빠르게 가입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 나라 말고도 홍콩·이탈리아·일본 등이 이미 IPTV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3년 8월 서비스를 개시한 홍콩에서는 2년 만에 가입 가구가 50만 가구에 달했다. 세계적으로는 그러나 아직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2개의 컨소시엄이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지난해 말 IPTV 시범사업을 마쳤다. C-큐브의 주관사인 KT는 지난해 11~12월 서울과 양평의 240여 가입자를 대상으로 시범 서비스를 실시했다. 40여 종의 쌍방향 서비스도 제공했다. KT는 시범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영화·어린이 VOD, 채널 서비스, 지상파 포털 등이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쌍방향 서비스 중에서는 다수가 생활정보 서비스, 게임·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등을 선호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KT 측은 응답자의 약 절반이 IPTV 서비스에 가입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정통부와 방송위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시범사업이 무난하게 추진됐고 IPTV의 기술적 가능성이 검증된 것으로 평가했다. 서비스 전환 대기시간이 긴 것 등 일부 기술적으로 미흡한 점은 상용 서비스에 앞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IPTV 시범 사업에는 네트워크를 보유하지 않은 ‘다음’도 참여했다. 네트워크를 임차해 융합 서비스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망 개방이다. 네트워크가 없는 사업자도 적정 가격에 망을 빌릴 수 있는 제도. 해외에서는 이미 프랑스의 프리 텔레콤(Free Telecom) 등 다수의 기업이 이렇게 네트워크를 임차해 IPTV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IPTV의 상용화는 공급자 쪽에서 볼 때 KT 같은 통신회사가 미디어기업으로 변신한다는 의미가 있다.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가 한계에 부닥치자 초고속 인터넷망을 타고 미디어산업에 진출해 이른바 ‘범위의 경제(economy of scope)’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네트워크를 공유할 수 있는 미디어산업에 뛰어들어 시너지 효과를 노리겠다는 것. 단순히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콘텐츠 유통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TV·홈엔 등은 IPTV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로텔레콤이 시도한 VOD 서비스인 하나TV는 지난 1월 가입자가 25만 명을 넘어섰다. VOD 서비스의 시장성이 검증된 셈이다. 다음 측은 인터넷 분야의 모든 비즈니스 모델을 IPTV에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연히 IPTV만의 고유한 수익모델도 구상 중이다. 방송사·통신회사 말고도 거의 모든 인터넷업체와 셋톱박스 등의 장비업체들이 IPTV를 주목하고 있다. 셋톱박스 업체들은 IPTV가 본격적으로 서비스되면 기술수준이 향상돼 수출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IPTV 서비스가 인기인 홍콩은 유료 방송 기반이 취약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총 가구의 88%가 유료 방송에 가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융합 서비스시장이 커지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더욱이 국내 케이블TV는 요금수준이 낮아 상대적으로 높은 IPTV 서비스 요금에 대한 소비자의 저항이 클 수 있다. IPTV에 대해서는 또 케이블TV와 차별화된 콘텐츠를 제공하지 못하면 케이블TV와 수신료 인하 경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유료 방송의 진입장벽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내 IPTV의 상용화는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KT 등이 벼르는 IPTV 서비스가 기술적으로 가장 앞선 방식이기 때문이다. IPTV가 비즈니스 모델로서 성공하면 따라서 해외시장도 노려볼 수 있다. IPTV 서비스는 그러나 규제 기관 통합 등 관련 법제화가 부진해 상용화가 지연되고 있다. KT의 한 관계자는 “1분기에 법제화가 이루어지고 하반기에는 상용 서비스가 개시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성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지상파 방송의 협력이 IPTV 성공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한다. 지상파 방송은 여전히 시청 점유율이 75~83%에 달하는 방송 콘텐츠시장의 절대강자다. “지상파 방송이 네트워크사업자들과 대립하거나 콘텐츠 수익에 대해 과도한 몫을 요구하면 IPTV사업이 난항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과거 위성방송, 그리고 지금 위성DMB가 지상파방송 콘텐츠를 확보하지 못해 부진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측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적정한 수익배분 모델을 만들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