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역사에서 배우는 개방의 지혜-한미FTA 타결을 보고
작성자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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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9976 등록일 2007/4/11 (6:35)
개방 실패는 바로 몰락의 비극
쇄국과 개방 충돌의 역사 되풀이…상대국과 윈-윈 전략 펼쳐야
역사에서 배우는 개방의 지혜

▶(좌)개화기 조선의 모습. (우)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으로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옛사람들이 역사에 거울 ‘감(鑑)’자를 쓴 이유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역사에는 개방을 둘러싸고 많은 갈등을 겪었던 사례들이 있다. 이런 사례들은 지금 개방을 두고 큰 진통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 하나의 시사점을 줄 것이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

우리 역사에서 ‘만약’이란 단어가 자주 생각나는 것은 그만큼 아쉬운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도 그런 경우다. 그는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과 함께였다. 만 8년에 걸친 인질 생활은 두 사람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더 키운 반면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현실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소현세자가 생각을 바꾼 결정적 계기는 인질 생활 만 6년째인 1643년(인조 22년)의 베이징(北京) 방문이었다. 청나라의 섭정왕인 예친왕(睿親王)이 베이징을 점령하러 가면서 세자를 데려간 것이다. 예친왕이 세자를 데려간 것은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베이징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면서 세자의 생각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머나먼 이국에서 만난 벽안의 신부와 세자는 곧 친한 지기(知己)가 되었다. 아담 샬은 천문학자이기도 했는데 이 만남을 지켜봤던 남천주당의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세자가 귀국하자 샬 신부는 자신이 지은 천문·산학(散學)·성교정도(聖敎正道)의 서적 여러 권과 여지구(지구의), 천주상을 선물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통해 성리학 이외의 새로운 사상과 중화(中華) 세계 이외의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계를 향해 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소현세자를 억류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청나라는 1645년 영구 귀국을 허락했는데, 이때 세자는 아담 샬에게 귀국하면 천주교 선교를 허용하고 “천문학에 관한 책을 곧 간행, 널리 읽히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세자가 귀국할 때 중국인 환관이자 천주교 신자인 이방송(李邦訟)·장삼외(張三畏) 등이 함께온 것은 개방에 대한 세자의 의지를 말해 준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성리학 유일 사상과 숭명(崇明) 사대주의 체제였다. 이들에게 세자의 개방철학은 오랑캐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 사상이었다. 8년간의 인질 생활을 버텨냈던 만 34세의 연부역강한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시신으로 변하고 말았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알아 볼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 ’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자)

인조실록의 이 기사는 세자가 독살당했음을 보여준다. 세자의 죽음은 세계를 향해 문을 열려던 개방적 조선의 죽음이기도 했다.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한 서기 1644년은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개국하기 232년 전이었다. 만약 그가 즉위해 조선을 개방으로 이끌었다면 조선 후기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만약’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실패로 끝난 정조의 개방

정조도 개방 군주였다. 집권당 노론(老論)이 정적인 남인들이 천주교 신자인 것을 빌미로 사교(邪敎·천주교) 금압을 주장하자 정조는 “사교가 성행하는 것은 정교(正敎·성리학)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정교가 바로 서면 사교는 저절로 소멸할 것이다”란 논리로 거부했다.

정약용이 기중기 설계도인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중가(起重架·기중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정조 덕분이었다. 정조가 궁중 비장 도서인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정약용에게 내려주면서 ‘인중(引重)과 기중(起重)에 대해 연구하라’는 구체적 지침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기기도설』은 스위스인 선교사 겸 과학자인 요한네스 테렌츠[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것으로 서양 물리학의 기초 개념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각종 기계장치가 그림과 함께 실려있는 책이다. 이는 정조가 당시 세계적 수준의 과학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정조는 세계에 대해 열린 사고와 과학적 지식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지만 그 역시 재위 24년 만에 독살설과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아서 조선의 개방을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만들었더라면 조선 후기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집권 노론(老論)은 나라의 문을 굳게 닫았고, 조선은 성리학 유일 사상 체제가 강화되었다.

개국 외면한 대원군

집권 초 대원군처럼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인물도 찾기 드물 것이다. 그는 “서대문을 낮추고 남대문을 높이겠다”는 공언처럼 노론(서인) 일당 독재를 무너뜨리고, 남인·소론·북인 등을 고루 등용하는 인사혁명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집권 초 그의 개혁은 민생개혁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다.

양반에게도 군포(軍布)를 받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양반들의 특권을 무너뜨렸으며, 지방관과 아전들의 착취 대상이던 환곡도 사창제(社倉制)로 전환했다. 선현 봉사(奉祀)와 학문 강독(講讀)이란 본연의 취지에서 벗어나 백성 수탈기관으로 변한 서원(書院)도 대폭 정리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목표가 성리학 사회의 재건이란 과거를 지향하면서 시대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개국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다. 청나라가 1841년(헌종 7년) 아편전쟁에 패배해 불평등 조약인 난징(南京) 조약을 체결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일본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무력시위 끝에 1856년 미·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대원군은 이런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나라의 문을 열어야 했다. 고종 3년(1866년)의 병인양요와 고종 8년(1871년)의 신미양요 직후가 좋은 기회였다. 프랑스와 미국을 꺾은 여세를 몰아 개국에 나섰으면 역사상 최초로 평등한 상태에서 조약을 맺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미양요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소각된 것 때문에 일어났는데,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 군함 5척의 공세를 격퇴하기는 했으나 미군 측의 전사자가 3명인데 비해 강화수비대는 600명 중 350여 명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전투에서는 패배했으나 전쟁에서는 승리한 것이다. 이 특이한 사례는 더 이상 조선이 쇄국으로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시대착오적인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했다.

외국을 서양 오랑캐로 보는 그의 시각은 성리학 사회를 정(正), 다른 모든 사회를 사(邪)로 보는 왜곡된 세계관의 표출이었다. 일본이 개국 후 서구 사회를 따라잡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동안 대원군은 성리학 세계관에 갇혀 개국을 외면했고, 그 후과는 민족 전체에 쓰라린 아픔으로 되돌아왔다.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조선에서 개국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절감했던 인물이 중인 계급인 역관(譯官)인 데는 이유가 있다. 역관들은 일찍이 청나라를 드나들면서 개국이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라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역관 오경석(吳慶錫)은 철종 11년(1860년) 8월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직후 그곳에 가 큰 충격을 받고 개화에 대한 확신을 굳히게 된다.

그는 의관(醫官) 유홍기(劉鴻基·유대치)를 끌어들인 후 박지원의 손자인 사대부 출신 박규수(朴珪壽)까지 개화파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후 박규수의 사랑방은 일종의 정치대학원 역할을 해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같은 명가 자제들이 개화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 후 고종도 개방의 필요성을 받아들여 고종 18년(1881년) 60명의 신사유람단이 일본으로 파견되는 등 개화는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면서 조선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군란으로 흥선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명성황후 민씨는 청국군을 끌어들였고,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했다. 김옥균이 『갑신일록』에서 ‘청당(淸黨)’ ‘민당(閔黨)’이라고 표현했던 친청 수구파 정권이 들어섰다.

▶강화도 신미양요. 김용만 화백


개화파가 이에 반발해 일으킨 것이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이었다. 김옥균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에게 “공사가 여기 오기 전에 우리 당(黨·개화당) 사람들이 이미 결정했던 것이고 일본이 원조하고, 않는 것은 본래부터 바라는 것이 아니다”(『갑신일록』 1884년 11월 25일)라고 선을 그었으나 결국 일본군의 원조를 받아들이면서 갑신정변 최대의 아킬레스건인 외세 의존 논쟁을 불러오게 된다.

갑신정변은 성공 후 14개 조의 개혁 정강을 발표하는 등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했으나 사회의 흐름 자체를 개화 쪽으로 돌리기보다는 소수의 정변으로 사태를 해결하려는 방식을 택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김옥균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도달하기까지 막부(幕府) 붕괴, 서남전쟁(西南戰爭) 등의 혹심한 내전을 거친 뒤에야 개화가 시대의 흐름이 되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정변 3일 후 청국군이 개화파를 공격할 때 민중도 개화파의 편이 아니었던 점은 큰 충격이었다. 당시 미국 공사 후트가 갑신정변의 실패 이유를 “대다수의 국민 대중이 그들의 새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고, 또 동정도 갖고 있지 못했다”고 본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좋은 비전과 정책이라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헛수고가 된다는 것을 갑신정변은 보여주었다.

▶정조대왕

통일 신라의 번영과 문제

삼국 통일 후 신라 수도 서라벌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삼국유사는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재위 875~886년) 때에는 서울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는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라벌에서 동해 바닷가까지 인가가 즐비했는데, 초가는 없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헌강왕 6년 조의 기록도 서라벌에 초가집이 없고, 밥을 숯으로 지었다는 사실까지 전해준다.

서라벌의 이런 부유한 생활을 가능케 만든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삼국통일로 그 영역과 인민이 늘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활발한 국제무역이었다. 이 무렵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은 ‘향약(香藥)의 길’이라고 불렸던 남해항로(南海航路)를 따라 중국 남부의 광저우(廣州), 양저우(楊州)를 거쳐 신라 서라벌까지 왕래했다. 경주 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로만 글라스는 당시 서라벌이 로마와 연결돼 있었음을 말해준다.

외국 상인만 신라에 온 것이 아니라 신라 상인도 해외로 진출했다. 9세기 중반 약 9년간 중국의 해안과 내륙을 여행한 일본의 구법승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등장하는 인물의 반 이상이 신라인인 것이나, 당나라의 해안 지역인 덩저우(登州)·양저우(楊州)·추저우(楚州)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신라방(新羅坊)·신라소(新羅所)·신라관(新羅館)은 당시 신라인들이 얼마나 세계화돼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헌강왕 때의 부유한 생활 모습은 활발한 국제무역의 결과물이었다. 문제는 이런 국제교역의 이익이 전국에 고르게 나누어지지 않고 서라벌에만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역사상 드문 태평성대처럼 묘사된 헌강왕 때의 기록이 나온 불과 9년 후(889년) 신라는 대규모 농민봉기가 발생하면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사회 전체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그들만의 번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국제교역으로 취득한 이득의 대부분을 서라벌 귀족들이 차지하면서 수도 서라벌은 풍성해져 갔지만 신라 전체의 내부는 곪아갔던 것이다.

한·중·일의 개국 이후 모습

한·중·일 세 나라의 개국 직후 모습은 서로 상이했다. 앞서 말했듯 일본도 개화가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 잡기까지 큰 진통을 겪었다. 개국파와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가 내전까지 치렀던 것이다. 그러나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 일본은 서구 배우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때 내건 구호가 화혼양재(和魂洋才)였다. 즉 일본의 정신(和)은 고수하면서 서양의 기술(才)을 접맥시키자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양혼양재(洋魂洋才)의 자세였다. 기술은 물론 정신도 서구 것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중국은 개국 후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내걸었다.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고도 불리는 중체서용은 중국식 화혼양재로서 중국의 정신(體)은 고수하면서 서양의 기술(用)을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일본과 달리 중화(中華) 사상과 중화 체제는 전혀 바꿀 생각이 없었다. 루쉰(魯迅)이 『아큐정전』에서 신랄하게 풍자했듯이 몸은 인력거꾼이지만 사고는 여전히 중화인이었던 것이다.

양혼양재와 중체서용이 직접 부딪쳤던 것이 1894~1895년 조선에서 격돌한 청일전쟁이었는데, 양혼양재를 채택한 일본의 한판승으로 끝을 맺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 등 청나라 고급관료들은 광서제(光緖帝)와 손잡고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도 불리는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을 시작했다.

변법자강 운동은 중국판 양혼양재로서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체제와 교육체제, 그리고 모든 것을 서구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정치·교육·산업·군대의 모든 부분에서 대대적인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개방의 기회 이렇게 놓쳤다

● 통일신라는 교역으로 생긴 부를 귀족들이 독차지해 망했다.
● 소현세자는 1645년 천주교를 도입하려 했지만 독살당했다.
● 정조의 과학적 지식과 개방 정책은 노론에 의해 봉쇄됐다.
● 국내 개혁에 성공한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개방을 막았다.
● 국민의 지지가 없었던 갑신정변은 김옥균의 3일 천하로 끝났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가진 서태후(西太后)와 보수파들이 군대를 동원 광서제를 궁에 유폐시키면서 변법자강 운동은 100일 만에 끝났고,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다.

조선도 일본의 화혼양재, 중국의 중체서용과 비슷한 것으로 신기선(申箕善)과 김윤식(金允植) 등이 제기한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있었다. 동양의 정신에, 서양의 과학 문명을 접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동도서기 외에도 성리학 사회를 고수하자는 위정척사(衛正斥邪), 동학, 개화 사상 등이 서로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결국 조선은 위정척사와 개화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왜 일본만 근대화에 성공했는지는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다. 현재 우리 사회의 표면적 모습은 한 세 기 전과 비슷하다. 지금은 누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갑신정변이 백성들로부터도 외면당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많은 사람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했다. 조선의 형편으로 강한 제국들에 문을 여는 데 많은 불안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다르다. 세계 10대 교역국이자 수출주도형 국가가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또한 한·칠레 FTA가 그랬던 것처럼 한·미 FTA도 평등 조약이다. 미국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한국은 한국의 국익을 위해 이 조약을 체결했다. 두 나라 모두 위기인 동시에 기회인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과감하게 몸을 던진 사람들이 만들어 온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농업 등 한·미 FTA 체제에 경쟁력이 떨어지는 분야에 대해 진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신라가 번영의 꼭짓점에서 몰락했던 역사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우리 하기에 달렸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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