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블룸버그
이번 미국 경제의 위기가 보다 심각한 이유는 달러화의 급속한 가치 하락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화의 가치 하락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패권이 위협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뢰벤 브레너(Brenner) 맥길대 교수는 지난 19일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를 통해 "신용 위기와 달러 약세 간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서 "달러의 추가적인 하락을 막기 위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미국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근 달러 가치는 바닥을 모를 만큼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달러는 엔화 대비 12년 만에 최저로 떨어졌고, 유로화에 대해서는 유로화가 도입된 1995년 이후 최저, 위안화에 대해서는 2005년 위안화의 달러 페그제 폐지 이후 최저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제학자들은 달러화 가치가 다른 국가들의 화폐에 대해 평균적으로 20% 이상 더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래야만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3%대로 줄어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용어설명)'이 비로소 감내할 수준이 된다는 것이다. 메릴린치의 이코노미스트인 로젠버그(Rosenberg)는 미국의 기준금리가 1%까지 떨어져야 금융위기를 진화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근 FRB가 0.75%포인트를 내려 지금은 2.25%이다.) 실제로 이러한 추가적인 금리 하락이 실현된다면 달러화의 가치는 보다 급속히 하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6년여에 걸친 달러 약세가 중요한 변곡점에 온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NH투자선물 이진우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석유·금·곡물 등 상품 가격이 급격히 꺾이는 것은 투기자금이 차익을 실현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만큼 전세계 금융기관의 달러 유동성 확보가 관건임을 반영한다"면서 "달러 약세가 단기 바닥을 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달러 약세의 뿌리는 글로벌 불균형
많은 전문가들이 달러화 가치 하락이 장기화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은, 달러 약세가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글로벌 불균형'이라 불리는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가 그것이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한때 GDP의 7%에 육박했다. 경상수지 적자는 국가 부채의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 정도 규모의 적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다른 나라 같으면 벌써 외환이 바닥나고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미국이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전 세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를, 미국은 필요하면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71년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金) 태환(兌換·conversion)을 정지함으로써 달러를 무제한 찍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물론 다른 국가들이 이렇게 쏟아져 나오는 달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통해 세계 경제에 공급되는 달러의 양은 급속도로 증가해 왔다. 글로벌 불균형은 글로벌 유동성의 팽창으로 이어지고, 이 중 일부는 외환보유고로 쌓여간다. 현재 세계 각국이 보유한 외환보유고는 최근 10년 동안 3배 넘게 증가하여 6조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이 중 중국이 1조 6000억 달러를 보유하여 단연 1위이다. 외환보유고가 모두 달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IMF의 조사에 따르면 달러 표시 자산이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64%로 아직도 압도적이다. 달러화 공급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면 달러화의 가치는 필연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달러 가치 하락은 어떤 점에서 세계 경제에 위협인가?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달러로 쌓아둔 각국 중앙은행이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며, 이는 결국 국가 재정의 악화로 이어지게 된다.
다음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도 가정해 볼 수 있다. 세계 각국이 보유한 달러 외환보유고를 다른 통화로 급격히 전환하면 달러는 폭락하게 될 것이며, 이는 인플레 압력으로 작용하여 미국 소비를 감소시키고, 궁극적으로 세계 경제 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 또 달러 약세가 지속되면 전세계 투자 자금은 안전 투자처로서 금이나 석유, 원자재 등 실물 쪽으로 더욱 쏠리게 될 것이며, 원자재 발(發)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세계 경제의 안정성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반면 달러 약세는 미국의 수출 증가를 가져올 것이며, 그만큼 경기 둔화를 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달러 급락은 세계 정책 당국자들의 머리를 싸매게 만들고 있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18일 기자회견에서 "지금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달러 약세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라 "언제 달러 가치가 바닥을 칠 것인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달러 가치 방어를 위한 외환시장 공조 개입 가능성 제기
달러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주요 선진국들이 달러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외환시장에 공조 개입할 것이라는 관측이 높아지고 있다. 누카가 후쿠시로 일본 재무장관은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G7 국가들은 과도한 통화 움직임이 세계 경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으며, 우리는 시장을 면밀히 모니터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진국들은 2000년 9월 유로 하락을 저지하기 위해 공조를 한 적이 있으며, 1995년 달러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연대를 형성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조가 어려울 것이란 관측도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협조가 관건인데, 이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은 위안화의 점진적인 절상을 추구해 왔으며, 이 때문에 중국의 달러 약세 현상은 EU나 일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결국 달러 약세의 충격을 고스란히 EU와 일본이 받아내야 한다는 불만이 높았다.
중국이 환율을 완전히 시장에 맡길 경우 위안화가 얼마나 절상될지에 대해 데이비드 위스 S&P 수석이코노미스트와 켄 골드스틴(Goldstein) 컨퍼런스보드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위클리비즈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각각 20%와 30%라고 전망했다. 또 미국과 다른 나라의 경제 상황이 다르다는 점도 환율 공조를 어렵게 한다. 경기침체로 접어든 미국과 달리 EU나 중국 등 개도국 경제는 비교적 탄탄한 편이라 금융정책이 한 방향으로 가기 힘든 것이다.
달러 약세에 대한 대비
달러 약세의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면,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일단 달러 중심의 외환보유고를 다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세계적으로 외환보유고 다변화가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중국은행(Bank of China) 렁(Leung)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향후 5년 이내에 세계적으로 달러 표시 외환보유고 중 1조 달러가 다른 통화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IMF에 따르면, 전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00년 71.1%에서 작년 9월말 현재 63.8%를 기록, 7%포인트 이상 줄었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우 같은 기간 중 10% 포인트 가까이 감소(69.7%→ 60%)해 선진국보다 감소폭이 컸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5년의 경우 한국 외환보유고는 달러화 비중이 60%, 유로화 20%, 엔화 10%를 차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수의 금융·통화당국 관계자들은 "외환보유고의 달러 비중을 줄이고 유로 등 다른 통화를 늘리는 건 세계적인 트렌드"라며 "이는 어느 나라건 공통된 현상이며 우리나라도 이런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다만 외환보유고의 통화를 급격하게 다변화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또 "대외 변수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내수시장을 키우는 정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달러 약세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대응은 최근 원화의 나 홀로 약세 현상으로 오히려 후퇴한 감이 있다. 예전에 달러 약세를 기대하고 과도하게 환 리스크를 헤지(hedge)했다가 손실을 보거나, 혹은 이득을 볼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환율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환율 헤지의 비용은 점점 커지고, 기업들은 환율 헤징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환율 변동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오히려 수출 대금으로 받은 통화를 선물환 계약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헤지하지 않고 그대로 보유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있다가 수입 대금 지급을 위해 해당 통화가 필요할 경우 사용한다. 이 관계자는 "과거에 결제 통화 비중은 달러:유로:기타 통화가 70:20:10 수준이었는데 지금도 큰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포스코도 삼성전자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다. 조선업체들은 선물환 거래를 통해 환율 변동을 거의 대부분 헤지하는 전략을 취해 왔으나, 달러가 예상과 달리 원화에 대해 강세를 보이면서 큰 이득을 볼 기회를 놓쳤다.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와 중국 등 신흥시장 국가들의 경상수지 흑자로 뚜렷이 대비되는 국가간·지역간 대외 불균형상태를 뜻한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면 대규모 대외 부채를 장기간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에 불균형 상태가 지속되기 힘들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균형점을 찾아가게 되는데, 문제는 이런 불균형이 급격히 해소될 경우 달러 가치가 급락하고 세계 금리가 동반 상승하면서 전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에 빠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