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슬람채권법 논란, 떳떳치 못한 개신교
작성자 이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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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5992 등록일 2011/2/27 (5:3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8679&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9

이슬람채권법 논란, 떳떳하지 못한 개신교
이자 행위 금하는 수쿠크 정신은 인간적... 개신교의 배타적 자세가 경계대상
11.02.25 14:26 ㅣ최종 업데이트 11.02.25 14:26 이찬수 (cshr)

  
2009년 12월 27일 아부다비 에미리트 펠리스 호텔에서 김쌍수(왼쪽) 한국전력공사 사장과 칼둔 무바락 UAE 원자력공사 사장이 이명박 대통령과 칼리파 빈 자예드 알 나흐얀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원전사업 주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 청와대
UAE 원전

지인 중에 대형 금속 주물을 생산하는 건실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분이 있다. 이 분은 물건을 생산해내는 제조업이야말로 어느 분야보다 정직한 직종이라는 지론을 펴곤 한다. 물건을 생산하고 생산한 만큼 돈을 버는 제조업은 돈으로 돈을 버는 금융업에 비할 바 아니라는 것이다. 정당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요사이 이른바 '이슬람 채권법(수쿠크)' 도입을 둘러싸고 국회 내에, 그리고 정부와 보수 개신교계 사이에 묘한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금융 위기에 대응하고 원전 수주 등에 필요한 자금을 이슬람권에서 유치하기 위해,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를 발행하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다가 보수 개신교계의 반발에 부딪혀 일단 유보되었다고 한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에서는 원칙적으로 물건 없이 이자만 오가는 행위를 금한다. 여느 국가에서는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빌리면 그 자금에 대해 이자를 주도록 되어 있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자를 금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독특한 금융 상품들이 개발되었다.

 

가령 기업이 채권을 발행하고 은행으로부터 일정 기간 돈을 빌리면서 기업 소유의 부동산 소유권을 은행으로 이전하면, 특수목적회사에서 그 물건을 활용해 수익을 창출한 뒤 은행에 이익금을 돌려주고, 채권 만기 때 채무자 기업이 원금을 변제하면 기업의 부동산 소유권을 회복시켜주는 방식이다.

 

이때 부동산 소유권이 오가는 사이에 생기는 양도세, 취·등록세 등의 세금을 면제해주어야 채권에 대한 이자 지급 없이도 금융 차입과 변제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수쿠크를 발행해 이슬람 자본을 확보하려면, 발생한 수익에 대해 취·등록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있는 현행 조세법을 일정 부분 개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자 행위 금하는 수쿠크 기본 정신은 인간적이고 종교적

 

  
조용기 목사는 "정부가 이슬람채권법 추진하면 대통령 퇴진운동을 벌이겠다"고 발언했다.
ⓒ 뉴스앤조이 자료사진

 

이런 취지에 따라 국회에서 조세특례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다가, '한기총' 등 보수 개신교계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고, 이번 회기 내에는 처리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슬람 채권법'을 통과시키는 국회의원에 대해 낙선운동까지 벌이겠다는 개신교권의 강경한 목소리에 대해 4·27 재보선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한껏 움츠러든 셈이다.

 

'이슬람 포비아'가 만연해있는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에서 이슬람채권법은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인데다가,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이 이슬람 테러 단체에 흘러들어 갈 가능성도 있어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이슬람 문화가 한국 내에 급속도로 유입되면 결과적으로 한국에 큰 피해가 올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슬람권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적극 지원하거나 동의하면서, 이슬람 문화의 유입에 대해서는 결사반대하는 보수 개신교권의 모순된 입장은 자기중심적이고 불공평하다. 이슬람 채권법으로 발생한 수익의 일부가 테러 단체로 흘러들어 갈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지나치게 단선적이다. 한국과 무역을 하면 그 수익이 한국 내 '조폭'에게 들어갈 가능성이 있으니 한국과 거래하면 안 된다고 누군가 주장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슬람 채권법에 대해 잘 안다거나 그 자체를 찬성한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 전문가가 전혀 아닌 탓에, 수쿠크를 경제와 자본의 논리로 정당하게 분석할 역량이 내겐 없다. UAE 원전 수주와 관련해 체결한 모종의 이면 계약을 해결하려는 숨은 의도로 이 법안을 마련하는 것이라면, 도리어 반대해야 할 것도 같다.

 

그럼에도 종교학도로서 수쿠크의 기본 정신은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물건이 오가지 않은 채 돈으로 돈을 낳는 이자 행위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에 담긴 정신은 참 인간적이고 종교적이다. 금융 위기가 항존하거나 고조되고 있는 시대일수록 이자를 금하는 이슬람 정신은 더욱 돋보인다.

 

숫자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가치가 실질 가치 이상의 힘 발휘

 

2008년 미국 월가 발 금융위기는 세계를 휘감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허상을 폭로하는 사건이었다. 물론 세계는 이미 자본과 시장의 힘에 강력하게 포획되어 있어서 그런 사건을 겪고도,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데도, 현 경제 질서나 구조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 구조의 기초에 거품과 같은 다양한 금융 상품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으며, 그 거품이 현 경제 질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금융 제도의 원리라는 게 무엇이던가. 이런 예를 들어보자.

 

농부 갑이 생산한 쌀값 만 원을 A은행에 맡기면 A은행은 자기자본율(10%라고 치면)을 지키고 9000원을 을에게 대출해준다. 을이 대출받은 9000원을 B은행에 예금하면 B은행은 병에게 8100원을 대출해주고, 병이 C은행에 8100원을 맡기면 C은행은 7290원을 정에게 대출해줄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현 금융 제도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대출을 이어가면 실질 생산액의 거의 아홉 배에 해당하는 가치가 창출된 것처럼 계산된다는 것이다. 부채를 늘리면서 추상적 자산 가치를 늘리고 그 자산으로 실물을 소비하는 구조이다. 그리고 이 추상적 자산이 유통되면서 경제의 기초를 형성해간다.

 

이런 계산법에 근거해 부채 창출을 통한 추상적 가치를 늘려가다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던 것이다. 농부 갑이 만 원을 일시에 찾아가면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있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자연 안에서 실제 생산된 것은 1만 원뿐인데, 부채의 연결고리를 통해 9만 원이라는 추상적 부를 창출해내는 계산법은 참으로 기이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금융 시스템이 형성되게 된 기초 중 기초에 '이자'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예금과 대출을 추동하는 힘은 '이자'이다. 이자는 맡긴 금액보다, 그리고 대출해준 금액보다 더 돌려받을 수 있게 해주는 근거이다. 그런 점에서 금융업은 이자 제도에 기반해 모인 자본을 활용해 자본을 늘려가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그 '부'라는 것이 숫자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가치인데도 실질 가치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욕망의 산물인 금융 제도 속에 있는 한, 그리고 그 제도를 이용하는 한, 투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은 계속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총부채는 늘어나고 빌려 온 가상의 가치를 실제 생산량 이상으로 소비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파산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힘이 센지, 현실이라는 정치의 힘이 센지 가늠하게 해주는 사례

 

지인의 신념마따나 제조업은 금융업에 비하면 분명히 정직한 사업이다. 농사 같은 1차 산업이야말로 가장 정직하다는 평가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일차산업은 땀 흘린 만큼 되돌려주는 자연의 법칙에 가장 부합한다. 자연의 힘을 빌려 생산된 쌀 한 가마니가 숫자적 가치로 환산되고, 그 환산된 추상적 가치가 실질 가치 이상으로 작동하도록 추동하는 금융 시스템은 사실상 인간 욕망의 산물이다. 욕망에 기반해 생산된 것 이상을 보장해주는 이자 제도이기도 하다.

 

이것이 금융업의 기초를 다졌고, 현 금융 제도는 급기야 부채로 부채를 막으면서도 그 모순을 느끼지 못하도록 인간을 구조적으로 묶어두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곱씹어보면, 이자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은 인간의 욕망을 제한하면서도 인간성을 피폐하지 않게 잡아주는 최소한의 끈처럼 생각된다. 빌려준 돈은 돌려받으면 그만이지 이자가 웬말이냐는 이슬람식 율법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유리한 정책이기도 하다. 빈자를 보호하면서 인간 평등을 추구하는 제도적 장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슬람'이라면 거부부터 하고 보는 보수 개신교권의 자기중심적 발상과 배타적 자세가 도리어 경계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종교계 일각의 주장으로 국가의 경제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일도 이례적이지만, 보수 개신교권의 후원을 받으며 탄생했고 유지되고 있는 현 정부와 그 개신교권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모습도 구경거리이다. 종교의 힘이 센지, 현실이라는 정치의 힘이 센지, 가늠하게 해주는 사례가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찬수씨는 현재 종교문화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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