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런던 국제법률가양성과정 연수기]“Iron Fist in a velvet glove”
작성자 채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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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5612 등록일 2006/6/7 (14:16)
[런던 국제법률가양성과정 연수기]“Iron Fist in a velvet glove”
채정원 변호사



겨울의 런던. 부슬비만큼이나 잦은 바람은, 길지 않은 이곳에서의 내 시간을 빠른 속도로 과거로 밀어내고 있다. 런던 행 비행기 속에서 찬란했던 기대와 희망은 아직 나를 떠나지 않고 콧노래가 되어 흘러나오고 있는데, 어느덧 귀국을 준비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내가 서 있는 이 땅, 새침한 말투의 영국인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런던에 온 것은 대한변호사 협회와 영국 외무성 (Chevening Scholarship)의 지원을 받아 영국 변호사 협회 (Law Society)가 진행하는 6개월 간의 국제 법률가 양성과정(International Lawyers Diploma Programme)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영국 변호사 협회는 이미 중국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이와같은 프로그램을 십 수년 간 계속하며 중국 법률시장과 우호관계를 쌓아왔지만, 우리나라 변호사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올해가 처음이다. 단기 연수인지라 학위를 받을 수는 없지만, 심도있고 집중적으로 진행되는 이 과정의 수준은 기대 이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영국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 학부에서 법률을 전공하거나 비전공자의 경우 다시 법률 전공 과정 (Bridging Course)을 이수해야 하며, 영미법계 외국 변호사들은 비교적 간단한 자격전환 시험(Qualified Lawyers Transfer Test)을 통해 영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법률 전공과정과 자격전환 시험은 영국의 각 법역(영국은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연합국가로서 각 지역의 법률과 관할이 상이하다)에 위치한 College of Law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나를 비롯한 4인의 한국인 변호사가 참가한 International Lawyers Diploma Programme도 College of Law (of England and Wales)에서 제공하는 과정이다.

런던 도착 후 이틀째 되는 날부터 시작된 학업과정에서는 12주간 총 240시간에 걸쳐 국제무역, 기업 인수·합병, 금융, 중재와 조정을 비롯한 국제 분쟁 해결 절차 등 국제 거래 관련 법률이 심도 있게 다루어졌을 뿐 아니라 영국의 common law system 및 EU 법의 골격까지 섭렵하였는데,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변호사 윤리 수업이다. 이 시간에는 영국 변호사 협회의 윤리 강령과 변호사법, 변호사 징계 사례 등을 배운다. 주목할만한 것은 영국 변호사들의 책임인수(Undertaking 간단히 말하면 ‘약속’이지만 이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변호사들이 그 직무와 관련해 한번 하겠다고 한 일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불이행은 불가항력에 의하여도 면책되지 않으며, 이유를 불문하고 변호사가 지키지 못한 약속은 소송사유이자 징계사유가 된다. 관련 사건이 종결되거나 고객과의 계약 관계가 끝난 후이거나 심지어 책임인수를 한 변호사가 퇴직한 후까지도 그 변호사와 책임인수 당시 소속 로펌의 이행 책임은 소멸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영국의 변호사 초년병들이 귀가 닳도록 듣고 또 듣는 말이 함부로 undertaking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하지만, 고객의 입장에서 보면 변호사가 한번 한 약속은 틀림없는 것으로 믿어도 좋다는 뜻일 것이다.

학업과정을 마무리하는 힘겨운 시험을 마친 후 변호사들은 런던 각지의 로펌으로 흩어져 실무연수에 들어갔는데, 나는 해상분야에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고객을 보유하고 있는 Richards Butler에 배치되었다. 이곳에서는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각종 세미나와 강연회에 참석하고 영국의 판례와 법률을 찾거나 우리나라 법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는 부수적인 일들도 했지만, 실무 연수답게 영국변호사들이 하는 일에 직접 관여할 기회도 주어졌다. 4주간 상사분쟁 팀 (Commercial Dispute Group)에서 국제 소송 및 협상 사례들을 7건, 2주간 해상팀 (Shipping Department)에서 국제 중재와 선박 관련 사례들을 3건, 현재 머물고 있는 국제거래 및 상품팀(International Trade & Commodities Department)에서 2건의 무역분쟁 사례들을 접해 볼 수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이제 다음 달 기업금융팀 (Corporate Finance Department)에서 4주간을 보내고 나면 나의 런던 생활도 마침표만 남게 된다.

영국변호사들에 관하여 언급할만한 것이 있느냐고 하면 이들의 집중력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이곳의 변호사들은 밤 늦게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 저녁 6시경이면 대부분 퇴근하고 8시쯤이면 회사가 텅 빈다. 그러나 이들의 업무 집중도는 만만치 않다. 구내 식당이 있지만 많은 변호사들이 사무실 안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며 일을 한다. 고객 1인마다 쏟는 정성도 대단하다. 해상 팀에 있을 때 참석했던 회의 하나는 피고가 된 고객의 인증진술서 작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오전 10시에 시작되어 휴식시간 없이 오후 6시20분까지 계속되었다. 점심 무렵에는 회사 내부 조리실에서 준비한 샌드위치가 들어왔을 뿐이다. 그런데도 무려 8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서류를 뒤적이며 질문을 하거나 설명을 하던 담당 파트너는 물론 그 곁에서 수많은 문답을 받아 적고 때로 프랑스어 문서를, 때로 스페인어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던 1년차 초년병 변호사 또한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으니, 체력이 실력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 과정의 또 다른 매력은 무엇보다 영국문화원과 영국 변협을 통하여 쉴새 없이 계속되는 각종 세미나와 파티이다.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참석한 수많은 모임에서 나는 영국과 세계 각국의 변호사들은 물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길지 않은 영국 생활 중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조금이나마 영국과 영국인들을 알아나가게 되었던 것 같다. 영국인들은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다. 영국 사람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thank you와 sorry, please를 듣지 않고는 단 1시간도 보내기 어렵다.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도 상냥하게 웃으며 건네오는 인사말을 들을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 먼저 탄 사람은 뒤따라 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몇 층에 가느냐고 묻고 그 층의 버튼을 눌러준다. 그러나 그들의 친절과 예의 속에는 그 무엇이라도 뚫고 성취하는 무쇠 주먹 (Iron Fist in a velvet glove)이 있다. 그들은 친절하지만 단호하며, 양보할 필요가 없는 것들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 냉철한 머리를가지고 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고 쉽게 미안해 하는 그들이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큰소리 한번 내는 일이 없지만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조목조목 논리를 따진다. 그러다가도 싸움이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조심스럽고 우호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방금 싸웠던 사람에게 이해심 가득한 대화와 미소를 아끼지 않는 놀라운 사람들이기도 하다. 친절과 예의로 성장을 한 영국인들, 신중하지만 강인한 영국의 변호사들이 영국을 가득 채우고 넘쳐 이제 해외로 쏟아져 내려 세계 각지에서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결코 신이 주신 행운이라거나 우연이 아니다.

법률시장 개방이 논의 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언젠가는 열리게 될 문이라도 우리 정부와 선배들이 힘을 다해 막아두고 시간을 벌어두고 있는 동안, 닫힌 문 뒤에서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준비해왔을까. 우리 변호사들은 언제 외국의 법률시장을 한번 넘어다 볼 수있을까.

아시아에, 유럽에, 아메리카에, 오스트레일리아에,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우리 변호사들의 숱한 발걸음이 바삐 미칠 그 날을 염원하고 또 염원하며, 이처럼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과 가족들, 대한 변협과 Law Society, 영국 문화원, College of Law, Richards Butler, 법무법인 지성, 특별히 박재승 전 변협 회장과 Joshua Margolis 미국 변호사, 런던의 Gregory 수사에게 말로 다하기 어려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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