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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수의 BIZ 시네마] 악마는 강하고 천사는 자유롭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원제 : The Devil Wears Prada(미국)
■ 감독 : 데이비드 프랑켈
■ 주연 : 메릴 스트립(잡지 편집장), 앤 헤서웨이(편집장 비서)
■ 장르 : 드라마, 코미디
■ 상영시간 : 109분(10월 20일 개봉)
■ 제작/배급 : 20세기 폭스/20세기 폭스 코리아
세계적 패션잡지라면 단연 ‘보그(Vogue)’가 꼽힌다. 10여 개 패션 강국에서 독립판을 발행하며 전 세계의 유행을 리드하는 이 잡지는 미국판과 영국판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계열의 이 양대 패션지에서 여성편집장으로 일한 안나 위투어라는 인물은 한때 세계 패션계에서 신화적인 존재였다. 세계 4대 컬렉션으로 통하는 파리·밀라노·뉴욕·런던의 패션쇼는 그가 나타나야 무대를 열 정도였다.
3년 전 미국 독서계를 풍미했던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모델은 바로 ‘보그’ 편집장을 지낸 안나라는 것이 정설이다. 원작자 로렌 와이즈버거는 바로 그녀의 비서로 일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패션잡지 이름을 ‘런 어웨이’로 붙여 보그와는 상관없는 듯이 비쳤지만 소설제목으로 나오는 ‘악마’는 아무래도 안나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패션계의 시각이다.
문제의 소설을 각색한 동명 영화를 보니 ‘악마’라는 표현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패션 전문가로서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한 CEO에게 어울리지 않는 별칭이라는 것이다. 평면적으로 봐선 쉴새없이 아랫사람을 몰아붙이는 자세가 비인간적일 수는 있겠지만 그녀의 능력과 공로로 봐선 세 과시를 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프라다’ 같은 명품 브랜드를 즐기는 것도 ‘패션계의 여왕’이라는 그녀의 입지로 볼 때 하등 문제 삼을 것이 못 된다.
영화는 제명에서 ‘악마’라는 고약한 비유를 해 놓고도 주인공을 잔뜩 치켜세운다. “그녀 밑에서 일할 수만 있다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원자가 수두룩하다는 것. 도대체 이 악마는 어떤 능력과 카리스마가 있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의 선망을 받는가. 영화에 나타난 그녀의 면면을 보면 대략 이렇다.
1. 사람을 포함해 사물을 한눈에 판별한다. (직관력)
2. 지시사항은 간단명료하며 예스-노가 분명하다. (지도력)
3. 한 번 써먹은 아이디어는 재탕하지 않는다. (기획력)
4. 큰돈을 들였어도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린다. (결단력)
5.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결과로 입증한다. (판단력)
이 정도라면 흠잡을 데 없는 CEO라 할 만하다. 악마라니 될 말인가. 그런데 괴팍한 성깔과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독선이 문제다. 두 비서에게 항상 정위치를 지키도록 요구하고 반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옷가지를 챙기는 등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약과에 속한다.
쌍둥이 딸이 『해리포터의 일기』 후속편을 읽고 싶어한다고 출판되지도 않은 책의 원고를 구해오라고 닦달하니 말이다. 의사 표시를 말보다 표정으로 하는 것도 문제다.
이렇듯 도도하고 오만한 편집장의 반대편엔 또 하나의 여성이 슬픈 얼굴로 서 있다. 바로 제2 비서로 채용된 사회 초년병이다. 그녀는 까다로운 편집장의 무리한 요구를 다 들어주는 능력을 보여 세계 최고 패션잡지에서 일할 수 있는 장래를 보장받는다.
그러나 막판에선 ‘1년간의 혹독한 수련기’를 보낸 것으로 만족하고 미련없이 사표를 던진다. 편집장이 악마라면 그녀는 천사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히로인은 누구인가. 악마인가 천사인가. 비즈니스맨들은 악마의 범상치 않은 경영능력에 주목하고 명성과 부와 권세를 누리는 그녀를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샐러리맨들은 할 일을 끝내고 호기 있게 제 갈 길을 가는 천사에게 박수를 보낼 것 같다. 원작자도 천사 쪽에 더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체에도 이 영화의 편집장 같은 별종 CEO가 많을 것이다. 어떤 기업인은 상식 밖의 언행으로 부하직원들을 들볶거나 제왕처럼 군림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런 군림은 어떻게 보면 성공한 사람의 특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영인의 진짜 파워는 지위보다 능력에서 나온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정 아이템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성공을 쌓은 CEO라면 스스로 군림을 안 해도 사원들이 알아서 떠받들어 줄 테니 말이다.
임준수·영화칼럼니스트 (coped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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